어머니가 침대머리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두세 살의 유아에게는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습관을 갖게 하기도 한다. 침대에 눕기만 하면 어머니가 재미있는 책을 읽어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좀처럼 자려고 하지 않는 나쁜 버릇도 없어진다.
나아가 밤마다 책을 매개로 해서 어머니와 아이가 커뮤니케이션하는 습관을 갖게 되면, 아이가 성장할수록 모자가 마주하는 기회가 적어지더라도 밤에는 반드시 얼굴을 마주하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즉 모자간의 신뢰가 침대머리의 대화에서 만들어지는 셈이다.
--- p. 80~81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의 하루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유태인들은 자녀를 대할 때 하루를 경계로 두려움이나 슬픈 감정이 그날에 끝나도록 배려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이를 아무리 호되게 야단쳤더라도 잠자리에 들 때는 다정하게 대하여 아이 마음속의 나쁜 감정을 씻어주는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은 스펀지와 같아서 꾸중한 뒤 그대로 방치해두면 나쁜 감정을 그대로 품어버리지만, 한 번이라도 쓰다듬어주면 스펀지에서 물이 빠져나오듯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이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공포, 혐오, 미움, 증오 등의 부정적인 감정은 그날그날 해소되지 못하면 잠에까지 파고들어 밤의 세계를 지배한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꿈속으로 파고든 감정들이 하루의 영역을 넘어서 내일까지 옮겨간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 p. 87~88
한국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놀 틈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부모의 교육열이 지나친 탓이다. 그런데 그런 부모들은 대개 자녀를 일류대학에, 일류회사에 넣어서 빨리 기반을 잡게 하고 자신들의 노후를 맡기려는 듯 보인다.
여기서 드러나는 한국인과 유태인의 육아법 차이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어디까지 지속시키는가, 하는 시간적 차이에 있다고 본다.
유태인에게 자녀는 어디까지나 그저 아들과 딸일 뿐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부모의 역할을 계속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늙었다고 해서 자식들이 봉양해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자식들에게 의존할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다. 이것은 가족이긴 하지만, 부모는 부모, 자식은 자식이라는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 철저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략) 그런데 한국의 어머니들을 보면, 대학 입학 후부터는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으므로 가능한 한 어릴 때 공부를 많이 시켜서 일류대학에 입학시킨 다음, 부모의 책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자녀의 참된 행복과 장래를 위해서는 아이의 욕구형태, 즉 놀고 싶어 하는 유아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p. 94~97
실제로 많은 어머니들은 야단칠 때의 태도가 분명하지 않다. 그것은 아이를 확실하게 꾸짖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용서하는 것도 아닌, 일상적인 잔소리일 뿐이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물론 좋은 효과도 가지고 있지만 아이의 마음을 오랫동안 짓누른다는 점에서 협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중한 물건을 깨뜨린 아이에게, “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니? 너는 뭐든 함부로 다루잖아. 다음에는 그냥 두지 않겠어!”라고 말하는 것은 협박에 가깝다.
자녀들을 협박하는 행위는 아이로 하여금 언제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게 한다. 부모가 꾸짖거나 용서하는 식의 명쾌한 결단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는 초조감을 느끼고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위압감을 유발하기도 하므로 결과적으로는 아이가 건강하지 못한 심리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따라서 부모의 분명한 태도는 아이를 솔직하고 진솔한, 마음이 건강한 아이로 자라게 한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 p. 170~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