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알 수 없는 영감과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작고한 소설가 이청준이 어머니에게 문안인사를 와서 엎드려 절한 뒤 “아주 강건해 보이십니다, 어르신” 하고 말했을 때, 그때가 마침 이른봄이었는데, 어머니는 그의 두 손을 모아 잡아 어루만지며 말했었다.
“요즘은 마른나무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라우.”--- p.20
“너는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디…… 어여쁜 얼굴에 어째서 이런 것들이 생겼다냐!”--- p.21
우리 집안에서는 진보적인 생각을 하곤 하는 어머니의 요청으로 모든 제사를 합동으로 지냈다. 어머니는 조선이란 나라는 제사만 지내다가 망했다면서, 여러 조상님들의 제사를 어느 한날을 잡아 한꺼번에 한사코 조촐하게 지내라고 명했다. 그것을 제일로 반긴 것은 종손인 형과 형수였다.--- p.25∼26
나는 곡식 자루 위에 책가방을 얹어 짊어지고 반찬단지를 들고 아버지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하고, 팔십 리를 걸어서 장흥 읍내의 자취방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가다 쉬고 또 가다 쉬기를 거듭하면서 싸묵싸묵 걸었다. 그 토요일 일요일, 이틀 동안의 강행군으로 인해 사흘 동안 다리 몸살을 앓곤 하면서도 나는 일주일에 한 차례씩 아니면 이 주일에 한 차례씩 어머니를 보러 왕래하곤 했었다. 열세 살, 열네 살, 열다섯 살의 소년을 그렇게 강행군하게 한 그것은 대관절 무엇이었을까.--- p.39∼40
나는 섭동攝動을 생각했다. 그것은 태양계의 행성이 다른 행성의 인력으로 인하여 궤도에 영향을 받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별과 아버지라는 별은 자기 궤도를 유영하다가 서로에게 인력을 미친 것이고, 그로 인해 서로의 궤도가 조금씩 달라진 것이고, 그리하여 평생을 나란히 흐르게 된 것 아니겠는가. 그것은 어쩌면 운명적인 율동인 것이다.--- p.107
다른 형제들은 소리내어 울지 않고, 다만 흐르는 눈물을 훔칠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한테 새로이 시집가신다” 하고 말하고 나서 두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어헉어헉 하고 소리내어 울었다. 살아오면서 늘 어머니의 광활한 품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곤 한, 여든을 눈앞에 둔 늙은 아들인 나 혼자만 어른답지 못하게 소리내어 운 것이었다. 나는 왜 철없는 아이처럼 그렇게 울었을까.--- p.203
“오냐, 오냐, 니 쓰라린 속, 이 어메가 다 안다, 내가 다 안다. 울어야 풀리겄으면 얼마든지 실컷 울어버려라.”--- p.216
죽으면 혼령이 있을까. 극락이나 천국은 있는 것일까. 그것들은 모두 허상이고, 세상은 덧없기만 한 것일까. 한 개의 파도가 모래톱에서 재주를 넘으며 부서지면, 뒤따라 달려온 파도가 그 부서진 자리에서 다시 부서졌다. 늙을 줄도, 죽을 줄도 모르고 영원을 사는 신의 또다른 모습인 바다 앞에서 유한한 생명체인 나는 어머니의 시간을 생각했다.
--- p.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