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비주류들도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변화, 혁신, 새로운 사회는 모두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일은 비주류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는, 당당히 자기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은 주류가 아니었던 우리는 중요한 고비마다 장애에 부딪혔다. 그리고 그때마다 대통령의 지원과 개입이 있어야만 했다. 결국 대통령 없이도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꿈꾸었지만, 대통령 없이는 한 발자국 내딛기도 어려웠다. 우리들의 꿈은 대통령의 미래에 대한 철학과 비전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셈이다. 이 공통인식이 우리가 책을 쓰는 가장 근본적인 바탕이 되었다.
--- p.12
나의 참여정부 경험을 기록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많이 고민이 되었다.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대통령에 대한 일화가 많은 부서에서 일한 것도 아니고, 특히 내가 했던 업무의 주 대상인 비주류집단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여전히 높지 않은데, 이에 관한 기록이 얼마나 흥미를 끌 수 있을지도 염려가 되었다. 또 대부분 기록이라는 것은 글 쓰는 이에게 우호적으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독자들은 이런 주관적 기록의 빈틈을 놓치지 않기 때문에 종종 논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기로 한 것은 참여정부가 이루었던 성과와 실패, 그리고 남은 과제들을 정리함으로써 그리고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과정을 소개함으로써, 비슷한 길을 걷게 될 그 누군가의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 p.20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는, 정말로 적대적인 환경, 결코 긍정적으로 이해해주려 하지 않는 언론의 감시망 속에 있었고 그 때문에 모든 참모들이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외부를 향해 말 한 마디 하기가 조심스럽다는 강박이 생길 정도였다. 실명으로 글쓰기는 막상 익숙해지면 그런 강박을 벗어내는 데도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장 큰 장애는 청와대브리핑에 대한 대통령 자신의 애착이었다. “나의 유일한 무기인데, 그걸 없애면 무얼 가지고 말을 하나” 라는 것이 최초의 반응이었다.
이때 이 문제로 대통령과 토론하면서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월권하지 마세요”다.
비서관이란, ‘관’자를 붙여서 그렇지 비서 아닌가. 대통령이 가장 애착을 지닌 시스템에 대해 “제 소관이니 제 계획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비서관이 참여정부엔 있었다!
--- p.77
이지원이 정착되기 시작한 2004년 하반기부터 청와대의 일하는 방식은 실질적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그중 대표적인 변화는 온라인 보고였다. 통상 대통령께 보고를 드리려면 대통령 일정부터 잡아야했던 과거와는 달리 온라인으로 보고를 올리고 피드백을 기다리면 된 것이다. 과거 같으면 행정관이 보고서를 작성해 비서관과 수석에게 보고해 검토를 받은 다음, 대통령 보고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아주 긴급한 사안을 제외하고는 짧아야 일주일 보통이 몇 주, 어떤 경우는 대통령 보고 일정을 잡지 못해 몇 달씩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지원 온라인 보고가 도입된 이후에는 중간에 불필요한 대기시간을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으로 올린 대통령 보고는 보통 평균 하루 이틀 안에 대부분의 처리되어 대통령의 피드백 의견을 받을 수 있었다. 실례로 어떤 보고서의 경우 작성자가 보고를 올리고 20분 만에 대통령의 피드백 의견이 첨부된 시행지시가 전달되기도 하였다. 또한 작성자가 보고서를 이지원에 올려놓고 퇴근을 했는데, 대통령님이 새벽 시간이나 주말에도 이지원에 접속해 검토의견을 주시는 경우도 많아 직원들 사이에서는 “대통령님은 언제 쉬시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 p.140~141
드디어 일이 터졌다. 대통령님께서 임대주택 건설사의 부도로 입주자들이 겪는 고통을 다룬 TV 시사 프로그램을 보시다가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라고 지시하셨고, 다음날 아침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대통령님이 보셨던 방송이 압축되어 상영됐다. 물론 나는 이미 보았던 프로그램이었고, 그 건은 민원으로 접수되어 담당 비서관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건이었다. 담당 비서관은 너무도 별문제 아니라는 입장이었고, 문제를 조사해 제시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던 터였다. 수석보좌관회의 말석에 앉아있던 나는 프로그램이 화면에 비추어지는 내내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내가 정치를 시작한 일이나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대통령이 문제를 지적하실 때까지 대처를 하지 못했던가 싶어 정말 속상했다. 이유야 어떻든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정책의 미비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상황을 민원으로 인지하고도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이후 그 사안은 민원제안비서관의 손에서 떠나 해당 비서관이 책임지고 처리해야 할 일이 되었다.
--- p.161~162
참여정부 출범시기에 내각에 참여한 여성장관은 역대 정부에서 가장 많았다. 강금실 법무부장관, 김화중 보건복지부장관, 한명숙 환경부장관, 지은희 여성부장관이 있었다. 청와대에는 박주현 국민참여수석이 임명되었다. 민원제안, 제도개선, 법무, 균형인사, 업무혁신, 해외언론, 국정홍보, 국내언론, 교육문화, 지속가능, 빈부격차차별시정, 시민사회, 정보과학기술, 정무, 행사기획, 보도지원 등의 영역에 여성 수석, 여성 비서관, 일반직과 별정직 여성 행정관들이 근무했다. 청와대의 여성 숫자는 적지 않았고 여성들의 목소리 또한 작지 않았다. 그러나 결코 같거나 동등한 것은 아니었다.
죽을 것처럼,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해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어갔지만,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더니 사람이 바뀌고 또 제도와 시스템도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제도나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사람이 먼저인 것을. 누가,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가 시스템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고, 그 반대는 아닌 것을.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으며 사람을 중시했고 사람만을 바라보았던 그 시간들이 10년이 넘은 요즘 참으로 새삼스럽다
--- p.237
마지막으로 내정된 후보는 김신일 후보였다. 그런데 이 후보는 정말로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는 인사였다. 인사수석에게서 추천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일단 한 번 만나 보자고 제안하였다. 이를테면 면접이었다. 교육부총리이니 정부 서열상으로도 매우 높은 자리여서 대통령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임명했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사실이었다. 나도 밖에 있었다면 ‘설마…’ 했을 터이다. 그러나 내가 그 진행과정 속에 들어가 있었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대통령과 교육부총리로 내정된 김신일 후보는 인사수석이 배석한 가운데 한 시간 반 동안 청와대에서 만나 만찬을 하면서 서로의 교육관을 피력하며 대화했다. 즉 대통령의 면접인 셈이었다. 김 후보는 두루두루 신망받는, 이를테면 중도인사였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신임을 얻고 있었으며 평생교육의 대가였다. 또 참여정부의 교육정책인 3불정책, 즉 본고사 부활 불가, 고교등급제 불가, 기여입학제 불가에도 찬성하는 인사였다.
장시간의 대화를 통해 두 지도자는 총론에선 교육관을 같이 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물론 세부적인 지론에선 뜻이 다른 점도 있었다. 즉 정부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자립형사립고나 특목고를 평준화 보완제도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피력하기도 했다.1)
결과적으로 김 부총리의 인선은 성공적이었다. 김신일 교육부총리 내정자에 대한 평가는 언론에서도 긍정적이었고 청문회에서도 큰 탈 없이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채택하여 임명할 수 있었다. 김 부총리는 임기 말까지 교육부총리 역할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으며 통합적인 교육정책을 펼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 p.254~255
어쨌거나 세계는 넓고 외신은 한없이 많아서 항상 넘쳐 나는 업무를 1+1으로 처리했으니 가성비는 괜찮은 비서관이던 셈이다. 게다가 해외순방 행사 중에는 김현 보도지원비서관을 빼고는 유일한 여성 비서관이라는 프리미엄 덕분에 틈틈이 여사님 공식 행사도 수행하는 1+2 비서관이었으니 청와대 전체를 통틀어 가성비는 최상위권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만 문제는 1+1이 업무 강도가 세서 정설에 따르면 한 명 분의 일만 해도 정년이 2년(1년 반이라는 설도 강력했지만)인 청와대 비서관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멀쩡하던 치아를 몇 개나 임플란트로 바꿨다거나 일하다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던가 하는 비서실 괴담을 들으면서도 법조계에서 가끔 있는 일이라 나는 나름 단련이 되어 괜찮을 거라고 내심 자신했었다. 그런 자신감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1+1은커녕 외신대변인 역할 하나도 제대로 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 p.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