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 번의 글쓰기 동안 토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쓰고 싶지만 쓰지 못했던 게 있었다고, 이제는 고백하고 싶다. 이야기의 주제가 삶이든 일이든 관계이든 추억이든, 뭐가 됐든, 그런 것들이 의미를 가지려면 어쩔 수 없이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로 연결되고 그건 삶의 종착지인, 단어를 쓰는 것조차 두려운, ‘죽음’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결국 삶과 죽음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으로 연결된다. 그런 쪽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지적 한계와 두렵고 우울한 기운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그동안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거나 가볍게 살짝 건드리기만 했다.
하지만 모든 생물은,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삶의 끝인 죽음을 얘기하지 않고 어찌 삶을 얘기할 수 있을까. 특히 나처럼 어느덧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게 남아 버린 사람들은 죽음과 좀 더 친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죽음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세 번째 배낭을 꾸리며」중에서
4시 반쯤 갑자기 새벽의 정적을 깨며 전화가 울렸다. 순간,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통해 들은 내용은 내가 예상한 불길한 느낌을 넘어섰다. “네팔에서 온 근로자가 방금 전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난 다리가 떨렸다. 무서웠다. 겁이 났다. 근무복으로 갈아입으며 두려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고,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중략)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일은 ‘왜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반복해서 몇 번만 들어가면, 결국 다 사람을 위해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지 않을까. 사람을 위해 일을 하다가 사람이 죽었다. 모든 생물체의 종착지 죽음. 죽음이란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 것들에 비하면 내가 하는 일은 하찮은 것일까. 내 삶은 살아야 할, 혹은 버텨야 할 가치가 있는 걸까. (중략)
알베르 카뮈의『시지프 신화』생각이 났다.『이방인』이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죽음’이라는 주제에 은유적으로 다가갔다면,『시지프 신화』는 용감하게도 ‘자살’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던지며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뤘다. 카뮈는 자살이라는 주제만큼 본질적인 질문은 없다고 단언했다. 왜냐하면 그 주제는 결국 ‘인간의 삶은 살 가치가 있는가?’라는 가장 근원적인 철학적 질문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질문 이외의 것들은 모두 사소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태양이 지구를 도는지 지구가 태양을 도는지 하는 진리조차도 자살이라는 주제에 비하면 사소하다고 했다.
---「죽음」중에서
앞에서 잠깐 소개했던 카뮈의『시지프 신화』, 좀 더 얘기해 볼까.
시지프는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다. 형벌은 ‘부질없는 무한 노동’. 바위를 산 위로 굴려서 올린다. 산 위에 바위가 다다르면 다시 밑으로 굴러 내려온다. 시지프는 다시 내려와 산 위로 바위를 올린다. 의미 없는 이 짓을 끝없이 계속해야만 한다. 이 신화는 누구나 다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근데,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시지프에게 이런 형벌을 준 걸까. 시지프는 절대자가 죽음을 명했지만 삶을 연장하기 위해 그 명령을 거부했다. 더 살고 싶어서 명령에 항거했고, 그래서 지옥에 떨어졌다. 삶의 열정이 죄목이다. 그렇다면, 형벌이 정말 심오하고 가혹하다. 어쩌면, 가장 삶에 가까운 형벌이 삶에 대한 열정이라는 죄의 응징이 되었다.
(중략)
또 한 가지 우릴 설레게 만드는 건 삶의 가치가 미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기쁨이 앞으로 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즉 삶의 기회가 남았다는 것, 나에게 주어진 것을 아직은 다 소진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 자체로 기쁨이지 않을까.
---「바위」중에서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터널 출구에 빛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금, 이곳 사막에서 프로젝트 리더로서 나에겐, 같이 값진 땀을 흘리고 있는 직원들을, 한국이든 인도든 필리핀이든 무사히 탈 없이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명은 없다.
---「리더」중에서
낙서 수준의 내 글에 무슨 노하우가 있겠냐고 겸손을 떨 수도 있겠지만, 그리 특별한 게 아니기에 공유 못할 이유도 없다. 내가 어떻게 글을 쓰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써 볼까.
---「글쓰기-1」중에서
책 읽기에 대해 전체적으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수다를 떨었으니, 이제 조금만 더 들어가 보자. 나에게 영향을 주는 책은 크게 보면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나의 가치관의 방향타가 된 전환점을 준 책, 둘째, 가치관을 좀 더 선명하게 만들어 준, 즉 내 머릿속에 있던 모호한 줄기가 명확한 언어로 표현된 책, 셋째, 내 가슴을 적셔서 감성을 자극하는 책, 넷째, 지적 호기심을 채워 주는 책.
짧게 표현하자면, 순서대로, 날 때리는 책, 날 잡아 주는 책, 날 적시는 책, 날 배부르게 하는 책이다. 비유를 하자면, 벼락, 나침반, 단비, 영양소 같은 책이다. 이 순서의 역순으로 어떤 책들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볼까.
---「책 읽기-2」중에서
베르베르는 우월한 외계 생물이 인간을 애완동물로 기르는 상상을 했고, 쿤데라는 인간이 꼬치구이에 꽂혀 구워지며 우월한 생명체에게 잡혀 먹히는 상상을 했다. 만화 [진격의 거인]에서는, 거대한 생명체가 인간을 잡아 올려서 한입에 먹는 상상을 한다. 이 만화가 충격적인 건, 인간을 먹는 거인의 표정 때문이다. 무서운 괴물의 표정이 아니라, 순진해 보일 정도로 해맑은 표정으로 인간을 먹는다. 이 만화의 첫 편을 잊을 수가 없다. 인간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요리를 만들고 식탁에서 가족과 앉아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먹는다. 거인이 해맑게 웃으며 인간을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물」중에서
엄마로 추정되는 생물체에 몸이 닿으니 따뜻하다. 내 몸에 닿은 게 오르락내리락한다. 내 배랑 똑같다. 엄마가 맞다. 바깥세상은 너무 무섭다. 엄마 배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 엄마 배를 파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그렇게 자다 깨다 한다.
---「동거, 백 일째」중에서
(신) 지금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
(인간) 눈이 빨갛습니다. 머리에 뿔이 나 있습니다. 이빨이 날카롭게 번득입니다. 등이 굽어 있습니다. 피부가 파충류 같습니다. 혐오스럽습니다. 악마입니다. 증오합니다.
당신은 나를 벼랑 끝으로 몹니다. 이거 견딜 수 있어? 견디네. 그럼, 이건 어때? 또 견디네. 이것도 한번 견뎌 볼래? 계속·····. 그렇게·····. 제가 졌습니다. 못 견디겠습니다. 벼랑 끝에서 뛰어 내립니다. 항복입니다. (중략)
(인간) 정말 가증스럽군요. 당신이 모든 걸 그렇게 만들어 놓고, 원망을 받아 주겠다니. 난 모든 걸 포용할 수 있다? 넌 미천한 존재이다. 뭐 그런 건가요. 장난하나요, 지금? 당신의 장난이 나한테는 뭐였는지, 알기나 해!
---「신(神)과의 토론」중에서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결함은 없는지 끊임없이 성실하게 고민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와 함께 노력하는, 모든 책임을 사람에게 짐 지우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며 잘못된 부분은 사과까지 할 수 있는, 겸손하고 따뜻하고 열려 있는, 그런 존재. 그런 신이면 좋겠다. 그런 신이라면 믿고 싶다.
---「삶을 바라보는 여섯 가지 각도」중에서
인류의 역사에서 신, 종교, 이데올로기라는 깃발을 들고 미래의 천국 건설을 위해 현재를 지옥으로 만든, 또한 그런 미래가 또 다른 지옥이 되어 버린, 인간의 생명을 미래로 가는 길에서 밟아 터뜨릴 수밖에 없는 벌레 다루듯 했던 집단의 광기가 언제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과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는, 그리고 내가 그 광기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끔찍한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 한, 그 안에 들어갈 수는 없다.
---「삶을 바라보는 여섯 가지 각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