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팔천 신들의 고향이 위태롭다. 사회 변화와 함께 신화의 무대가 되었던 무속의 기반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제주 공동체의 생활 의식을 규정했던 신화의 힘은 사회 변화와 함께 생활규범으로서 지위를 거의 상실했다. 신앙민이 떠나버린 무속, 삶과 유리된 신화, 그 속에서 일만 팔천 신들도 고향을 잃어가고 있다.
신화는 초월적인 신의 내력담이며 동시에 숨겨진 문화의 역사이다. 얼핏, 신화와 문화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을마다 존재하는 당을 보면 그 속에는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 그래서 제주의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신화가 곧 문화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서는 신의 위치를 잡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제주문화의 정체성도 제대로 정립할 수 있다. 신의 좌정처는 어디일까. 당일까? 당에만 머무는 신은 살아 있는 신이 아니다. 신앙민들의 가슴속에, 생활 속에 깃들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이 되어 당에 머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신화가 되려면 심방의 입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심방의 입에서 끝나는 신화는 생경한 제주어의 이해되지 않는 주술일 뿐이다. 수많은 독자의 가슴속에서 이해되고 공감되고 소통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화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주신화를 살아 있는 신화로 자리매김시키지 못하고 있다.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심방의 입에만 매달렸고, 혹, 고장난 레코드가 이상한 첨가음을 내거나 한 칸 건너뛴 소리를 내는 것처럼, 어떤 심방이 어떤 이야기를 조금 바꿔서 하면 새로운 원전(原典)을 발견한 듯 호들갑을 떠는 형국이다.
해석과 창작을 시도하는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모든 해석에는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지만 그렇다고 여성성을 과대 포장하거나 지나치게 영웅성을 강조하는 것을 올바른 해석으로 보기 어렵다. 그것이 해석자의 정치적 편향성이 아니라고 하려면 적어도 일관된 해석과 해석의 방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채록을 넘어 독자들이 읽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일관된 해석 방법으로 풀어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현대문학의 연구를 위해 내가 정립했던 ‘인지시학’의 방법을 제주신화에 적용했다.
‘인지시학’으로 풀어서 꺼낸 제주신화는 문자로 기록할 수 없었던 민중의 삶의 지혜, 아픔, 투쟁의 전언이었고 역사였다. 어떻게 삶을 이어왔는지, 삶을 이어오기 위해 어떤 질서와 제도가 필요했는지, 그 제도가 어떻게 생성되고 소멸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태어나 지금까지 제주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체득한 제주문화에 대한 약간의 이해와 인지시학의 방법이 나를 신화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게 하였고, 그리고 신화가 숨겨놓은 제주의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있게 만들었다. 그것이 ‘신화가 숨겨놓은 제주’라는 부제가 달린 『신화 비밀 코드』이다.
이제 신화 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제주신화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제주의 오름과 바닷가 돌 사이에, 지금까지 생경한 제주어와 상징으로 숨어 있던 신화가 상징의 옷을 벗으면서 차진 언어로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우리 청소년들도 이 책을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 못지않게 재미있는 제주신화를 만나게 될 것이다.
달빛에 젖어 있던 신화가 우리 모두의 관심으로 햇빛에 바래는 역사가 되기를 기대하며 쓴 『신화 비밀 코드』는 청소년을 포함한 독자들에게 다양한 상상력과 재미를 줄 것이다. 제주신화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신화를 해석하는 나의 상상력을 즐기면서 제주 문화를 체험하는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제주신화를 이미 접했던 독자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 중간에 읽기를 포기했던 독자들은 의미를 깨닫는 놀라운 경험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신화 연구자들에게는 신화의 의미를 추출하고 해석하는 방법 하나를 부가적으로 획득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신화 비밀 코드』는 독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패턴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한쪽에는 제주신화의 원전을 의미가 파괴되지 않게 충실히 실었고, 다른 한쪽에는 신화가 숨겨놓은 제주의 역사와 문화가 흐르도록 배치하면서 읽기 쉽게 구어체를 사용하였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교리를 해석했다고 해서 종교의 권능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 심방이 구술하는 신화를 풀어냈다고 해서 신의 권능이나 심방의 권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그리고 사회적 관심이 전혀 없던 시절부터 오랜 세월 개미가 좁쌀을 줍듯, 제주신화의 채록을 위해 헌신하신 문무병 선생, 진성기 선생, 그리고 고(故) 현용준 선생께 경의를 표한다. 채록의 시대를 넘어 해석의 시대로 나를 이끈 힘의 근원이 선학(先學)들의 공덕임을 밝힌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