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 중에서는 가톨릭서적을 연구하다가 그 내용에 심취하여, 본격적인 신앙생활은 아니라고 해도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가톨릭교회의 예전(禮典)에 따라 그것을 실천해보고 싶은 의욕이 생긴 이들이 있었다. 이러한 실천적 서학 의례(儀禮)를 최초로 실행한 것으로 전하는 학자가 홍유한(洪儒漢)이다. 그는 1770년 무렵, 서학서적을 탐독한 후 일단 ‘성수주일(聖守主日)’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여 6일간 열심히 일하거나 학문을 탐구한 후, 7일째 되는 날을 ‘주일’로 지켜 안식하며, 기도와 묵상, 금욕적 생활을 실천하였다. --- p.19
한국가톨릭의 순교, 수난의 역사는 거듭되는 ‘교난(敎難)’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데, 각 박해 때마다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시대별 박해의 순서로 볼 때 조선시대의 것으로는 제일 마지막 박해인 ‘병인박해(丙寅迫害)’, 곧 1866년부터 1873년까지 7년 동안 진행된 고종대의 박해에서만 해도 8,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이전 여러 차례의 박해에서 순교한 이들의 수를 전부 추산하면, 1만 5,000명은 충분히 넘을 정도이지만 정확한 숫자는, 전체적인 자료의 부족으로 통계를 내기가 불가능하다. --- p.72
1895년 이후 앞서 신구교 갈등이 심했던 황해도 지역의 가톨릭교회를 관할하는 프랑스 신부 빌렘(J. Wilhelm)이 부임하면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의 부임 당시 비교적 소수이던 가톨릭 교인이 불과 6~7년 만에 열 배 이상 늘어나 7,000명 정도에 이르면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더구나 당시 지방관헌은 혼돈 중의 중앙정부에서 보낸 탐관오리가 대부분으로 공정하고 강력한 지방행정을 확립하지 못했다. 빌렘 신부와 일부 가톨릭 신도들은 사적으로 힘을 행사하였다. 부당한 세금징수를 막아준다든가 송사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민간인을 불법으로 구금하기도 하고 관헌을 무시하며 실제적으로 부당한 행정권, 사법권을 행사하기도 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수한 종교적 목적의 개종이 아닌, 현실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톨릭의 힘에 영합하는 거짓 신자들도 득세한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당시 가톨릭 선교사, 때로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현실적 힘의 위세를 부리는 것을 이른바 ‘양대인자세(洋大人藉勢) 현상’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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