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인 나는 곪을 대로 곪고 썩을 대로 썩어 있기 때문에 너무 지쳐 있다. 말로만 자기반성, 자기비판, 자기 창조를 이야기할 뿐, 실은 기진맥진하여 거대한 ‘사회 벨트’가 실어 나르는 대로 막연히 굴러가고 있다. 그런데도 일상적인 나는 어떻게 생명을 유지할까? 지배욕과 이기욕이라는 원초적 욕망이 욕망 충족을 강하게 원하므로 당장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만 같으면서도 숨을 헐떡이면서 사회라는 벨트 위에서 끈질긴 생명줄을 놓지 않는다.
이런 막다른 골목에서 일상적인 나는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해야만 할까? 일상적인 나는 사방에서 엄습하는 불안을 극복할 힘이 없다. 어쩌다 보니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아 아이를 가져야 할지 고민한다. 대기업에서 일해도 몇 년 버티면 퇴직해야 하니 미래가 항상 불안하기만 하다. 삶의 절망은 쓰나미처럼 자주 일상적인 나를 덮친다. 불안과 공포가 한꺼번에 나를 억누른다. 공포는 대상이 뚜렷한 두려움이고, 불안은 막연한 두려움이다. 공포의 원천은 불안이다.
---「하나, ‘일상적인 나’는 누구인가」중에서
실존주의나 해체주의가 등장한 이후로 인간과 국가에 대한 담론은 거대 담론(독단론)을 붕괴시키고 미세 담론(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으로 향하고 있다. 공자와 플라톤의 인간관 및 국가관은 거대 담론에 속한다. 그런데 칼 포퍼 또는 미셸 푸코 이후 거대 담론은 타당성을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어떤 주제든 시간, 공간, 상황, 인간, 관점 등에 따라 의미가 변할 수 있고 다원적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담론의 주제도 더 이상 완전하고 절대적일 수 없다. 완전성과 절대성은 희망 사항일 뿐인데도, 철학자들은 철학적 비판을 망각하고 종교적 신앙처럼 완전성과 절대성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인간과 국가를 실현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헤겔은 전쟁을 필요악이라고 했고, 전쟁 역시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의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여덟, 정의로움의 결정체, 이상 국가는 가능한가」중에서
미세 담론은 거대 담론을 해체하는 열린 담론이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란 점진적으로 바람직한 사회를 다원적으로 모색해 나가는 사회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완전하고 절대적인 플라톤의 이상 국가, 헤겔의 절대정신의 국가, 마르크스의 과학적 공산주의 사회는 닫힌 사회이고, 닫힌 사회에서 인간은 억압받고 강요당할 뿐이라고 역설한다. 열린 사회는 이상 국가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이상 국가를 받아들이고 해체하는 사회이므로,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하다.
---「아홉, 느림과 여유의 삶을 누릴 수 있는가」중에서
나는 석사 과정이나 박사 과정 학생들을 엄하게 꾸짖곤 했다. 물론 공부가 쉽지 않으니 힘내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육에는 한계가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스스로 깨우침’이 그 답임을 깨달은 것은 나이 60이 훨씬 넘은 후였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교육은 스스로 깨우침과 거리가 멀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교육의 목적이 참다운 인간을 육성하는 것임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것부터 얻기 위해 교육한다.
‘스스로 깨우침’과 교육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할 텐데 현실 생활에서는 왜 전혀 관계가 없는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한다. 내가 학생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왜 배우는가? 답은 간단하다. 배운 것을 잊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배운 것을 모두 던져버리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열셋, 무엇을 배우는가, 어떻게 배우는가, 왜 배우는가」중에서
거대한 피라미드,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 만리장성을 보면 나는 착잡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느림과 여유의 삶을 조금이라도 맛보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지고 도대체 문화가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인지 고뇌하게 된다. 사람들은 느림과 여유의 삶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상에서의 탈출, 휴가, 자유, 한가로움 등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느림과 여유의 삶은 일상의 삶을 가까이에서, 또 멀리서 예리하게 통찰하는 삶이다. 즉,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의 삶이자 자기 창조의 삶이다. 궁극적으로는 자아 자체를 극복하는 삶이다. 느림과 여유의 삶이 자기 역할을 다했을 때 삶은 욕망의 산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기야 욕망도 헛된 인간의 공허한 상상인지도 모른다.
---「스물둘, 창조와 파괴는 문화의 두 얼굴인가」중에서
인간의 고통은 바로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생긴다. 인간의 유한성은 자연의 유한성을 근거로 삼는다. 따라서 고도의 지능을 갖추게 된 인간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자연의 불변하는 원리를 끊임없이 추구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원리를 깨닫고 하나가 된다면 모든 고뇌와 번민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최초에는, 실로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실로 존재자가 산출되었다.”
무(無)로부터 우주 자연이 산출되었다는 생각은 이미 리그베다(Rig-Veda) 등에 포함되어 있던 내용인데, 후에 『우파니샤드』에서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다. 비존재나 존재, 불멸의 존재 등은 모두 하나의 자연 원리를 뜻한다. 여러 『우파니샤드』에서 이것들은 다시 ‘모든 것을 만드는 자’, ‘하나의 신’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서른하나, 나와 우주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