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첼 양?”
가브리엘 에머슨 교수의 목소리가 세미나실을 가로질러 뒤쪽에 앉아 있는 매력적인 갈색 눈의 어린 여학생에게 전해졌다. 해석에 열중했는지, 앳된 여학생은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열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긴 속눈썹, 펜을 잡고 있는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쏠렸다. 그리고 다시 강단 위에 꼿꼿하게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교수에게로 되돌아갔다. 에머슨은 감성 어린 큰 눈, 가지런한 치열, 멋진 외모와는 달리 냉철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엄하게 굴 때는 그의 남성적인 생김새에서 풍기는 매력이 철저히 반감되었다.
“으흠.”
오른편에서 들리는 가벼운 기침 소리에 그녀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미소를 짓더니, 단상에 서 있는 교수 쪽을 보라고 눈짓했다.
남자의 시선을 따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분노에 찬 눈초리로 자신을 쏘아보는 푸른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강의실에 다 들릴 만큼 큰 소리로 꿀꺽 침을 삼켰다.
“미첼 양, 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네. 자네가 수업을 듣고 있다면 말이야.”
교수는 눈빛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머지 대학원생들이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뭐가 또 거슬려서 저러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첼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교수를 보며 잠시 입을 벌렸다가, 이내 다물고는 겁에 질린 토끼 눈을 했다.
“자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나?”
교수가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교수의 오른편 앞쪽에 앉아 있던 검은 머리의 여학생이 웃음을 참으려 헛기침을 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다시 겁에 질린 미첼에게로 쏠렸다. 그녀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교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미첼 양이 다른 나라 말로 수업을 듣고 있는 것 같으니, 누가 내 질문에 대신 대답하겠나?”
오른쪽의 아름다운 여학생이 그 말에 열성적으로 반응했다. 그녀는 교수를 향해 자신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다는 듯 간절한 눈빛을 보냈고, 단테의 한 구절을 이탈리아어로 인용하면서 의기양양한 몸짓을 취했다. 대답이 끝나고 검은 머리 미녀는 세미나실 뒤쪽을 쳐다보며 뿌듯한 듯 미소를 짓더니, 교수를 쳐다보며 숨을 골랐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단상 위로 올라가 교수의 다리에 등을 비비며 애교를 부릴 것만 같았다. 그런다고 그가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다.
교수는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인상을 쓰며 학생들을 쳐다보더니, 다시 칠판을 향해 돌아섰다. 미첼은 눈물을 글썽이며 필기를 계속했지만, 다행히 울지는 않았다.
몇 분 후, 교수가 구엘프와 기벨린(구엘프는 중세 말에 교황을 지지한 교황당, 기벨린은 신성로마제국이 황제를 지지한 황제당이다-옮긴이) 사이의 갈등에 대해 지겹게 설명을 이어가고 있을 때 미첼의 이탈리아어 사전 위로 작은 쪽지 하나가 전해졌다. 처음에 그녀는 쪽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자 옆자리의 잘생긴 남자가 조그맣게 기침 소리를 냈다. 남자는 아까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쪽지를 가리켰다.
미첼은 그제야 쪽지를 발견하고 눈을 깜박였다. 칠판에 끝도 없이 이탈리아어를 적고 있는 교수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는 메모를 집어 들고 무릎에 놓은 뒤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에머슨은 왕재수임.
옆자리의 남자 말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미첼은 쪽지를 읽고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의 뺨은 핑크빛으로 물들었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이가 드러나고 보조개가 생기도록 환하게 웃은 것은 아니지만, 틀림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큰 눈망울을 들어 수줍게 그를 쳐다보았다. 친근하고 환한 웃음이 남자의 얼굴에 퍼졌다.
“뭐가 그리 재미있지, 미첼 양?”
순간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공포로 휩싸였다. 남자는 재빨리 미소를 감추고 교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교수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았기에, 고개를 숙인 채 탐스러운 아랫입술을 거듭 깨물었다.
“교수님, 제 잘못입니다. 지금 몇 페이지인지 물어보았을 뿐입니다.”
친절하게도 남자가 그녀 대신 나섰다.
“폴, 박사 과정인 자네가 하기에는 상당히 부적절한 질문이군. 그렇지만 자네가 물었으니 우리가 첫 칸토(장편 시의 한 부분―옮긴이)를 시작했다고 알려주지. 미첼 양의 도움 없이도 찾을 수 있을 걸세. 아, 그리고 미첼 양?”
미첼이 눈을 들자 겁먹은 토끼 양의 포니테일이 가볍게 흔들렸다.
“수업이 끝나면 내 방으로 오지.”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