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물리학의 발견들은 주지하듯이 우리의 과학적 세계상(世界像)에 중요한 변화를 초래했다. 그 발견들로 인해 자연 법칙의 절대적인 타당성은 산산이 부서지고 상대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 법칙은 통계적(statstical) 진리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우리가 거시물리학적 양을 다룰 때만 법칙은 완전히 타당하다는 것이다. 매우 작은 양의 영역에서는 예측(prediction)이 불가능하지 않다면 불확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작은 양들은 더 이상 기존의 자연 법칙과 일치해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연 법칙이란 관념이 기반한 철학적 원리는 인과율(causality)이다. 그러나 만일 원인과 결과 사이의 연관이 단지 통계적으로만 타당하며 상대적으로만 진리라면, 이때 인과 원리는 자연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상대적으로만 유용하다. 그렇기 때문에 설명을 위해 필요한 하나 더 혹은 그 이상의 요인들의 존재를 가정한다. 이것은 사건의 연관이 어떤 환경에서는 인과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설명 원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 p.60
동시성적 사건들은 두 개의 상이한 심리적 상태들의 동시적 발생(simu taneous occurrence of two different psychic states)에 의존한다. 그것들 중의 하나는 정상적이고 개연적인 상태이며(즉 인과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 다른 하나는 결정적인 경험인데 그것은 처음부터 인과론적으로 도출될 수 없는 것이다. 갑작스런 죽음의 사례에서 경험은 ‘초감각적 지각’(ESP)처럼 즉각적으로 인식될 수 없었고 다만 후일에야 입증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풍뎅이’의 사례에서조차도 즉각적으로 경험된 것은 어떤 심리적 상태 혹은 단지 즉각적으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꿈 이미지와는 다른 심리적 이미지이다. 새떼의 사례에서는 여인에게 어떤 무의식적인 동요가 내게는 틀림없이 의식적이며 나로 하여금 심장전문의에게 환자를 보내게 만든 두려움이 있었다. 이 모든 사례들에서 이것이 공간적 ESP이든 시간적 ESP든 우리는 인과적으로는 도출되지 않고 그 객관적 존재가 후일에야 입증될 수 있는 또 다른 상태 혹은 경험을 지닌 정상이거나 평범한 상태의 동시발생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 정의를 특히 그것이 미래 사건의 문제일 때는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명백히 동시적(synchronous)이지 않고 동시성적(synchronistic)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객관적 사건이 이미 존재했을지라도 현존하고 있는 심리적 이미지로서 경험되기 때문이다. --- p.93
인과율이라는 원리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연결이 필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시성 원리는 어떤 의미 있는 일치라는 용어가 동시발생(simultaneity)과 의미(meaning)에 의해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만약 ESP 실험들과 수많은 다른 관찰들이 기정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원인과 결과 사이의 연결 외에도 사건들의 배열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의미로서 나타나는 사실상의 또 다른 요인이 있다고 결론 내려야 한다. 비록 의미가 의인화된 해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동시성의 없어서는 안 될 기준을 형성한다. 우리에게 의미로서 나타나는 요인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하나의 가설로서 그것은 보기보다는 그렇게까지 불가능하지는 않다. 우리는 서구의 합리적 태도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태도는 아니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도 아니며, 아마도 많은 점에서 수정되어야 하는 편견이고 선입견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p.147
고전적 중국인의 사유 기초와 중세의 소박한 관점의 토대를 이루는 동시성과 자존적 의미라는 관념은 우리에게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회피되어야 하는 케케묵은 가정으로 생각되는 듯하다. 비록 서양은 이 낡아빠진 가설을 폐기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버렸지만, 그것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어떤 주술적 절차들은 소멸된 것으로 보이지만, 오늘날 전례 없는 명성을 얻고 있는 점성술은 매우 생생하게 남아 있다. 과학적 시대의 결정론은 동시성 원리의 설득력을 전혀 제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결국 그것은 미신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진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사건의 물리적 측면보다는 단지 사건의 심리적 측면과 관계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은폐되어 왔다. 인과율이 어떠한 부류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 우리가 어떤 설명 원리로서 형식적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한 것은 현대 심리학과 초심리학(parapsychology)이었다. --- p.175
동시성은 철학적 관점이 아니라 지적으로 필요한 원리를 가정하는 하나의 경험적 개념이다. 이것은 유물론이라든지 형이상학이라고 불릴 수 없다. 신중한 탐구자라면 존재하는 관찰된 것의 본성과 관찰하는 정신의 본성이 알려지거나 양으로 인식된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최근의 과학적 결론이 한편으로는 공간과 시간에 의해서 특징지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과율과 동시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에 대한 일원적 사고로 점점 다가가고 있는 중이라면, 그것은 유물론과 어떤 관계도 없다. 오히려 관찰자와 피관찰자 사이의 불가공약성을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 그 경우에 결과는 파울리가 한때 불렀던 것처럼, 어떤 “중성적 언어”인 하나의 새로운 개념을 가진 언어에 의해 표현되어야 하는 존재의 통일이 될 것이다. --- p.189
자연법칙은 실질적인 확실함을 가지고 경험적인 재료만으로도 생길 수 있다는 관점을 따르는 수많은 물리학자들은 최근에 들어서는 새로이 직관과 주의(attention)의 방향이, 일반적으로는 단순한 경험을 멀리 초월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자연 법칙의 체계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즉 과학이론), 개념과 관념의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순수하게 경험적이지 않은 개념의 관점으로부터 우리도 인정하는 것이지만 의문이 생긴다. 즉 감각 지각과 개념에 다리를 놓아주는 것의 본성은 무엇인가? 모든 논리적 사유인들은 순수한 논리는 근본적으로 그러한 연결을 만들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점에서 우리의 선택과 독립적이고 현상 세계와 구별되는 어떤 우주적 질서에 대한 가정을 도입하는 것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것 같다. “관념 안으로 자연 사물을 관여함”을 말하든, “형이상학적인 것의 행동, 즉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을 말하든, 감각 지각과 관념 사이의 관계는 지각하는 자의 영혼(soul)과 지각에 의해 인지되는 것 양자가 객관적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질서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예기하는 것 등이 된다. --- p.225
케플러에 따르면, 그가 비스 포르마트릭스(vis formatrix, 형성력) 혹은 마트릭스 포르마티바(matrix formativa, 형성모체)라고 부르는 개별 영혼은 본능(instinctus)의 도움으로 원의 특유한 합리적 분할에 상응하는 어떤 조화로운 비율에 반응하는 근원적인 능력을 소유한다. 음악에서 이 지성적 능력은 어떤 음계에서 활음조(협화음)의 지각에서 자신을 현시한다. 그것은 케플러가 순수하게 기계적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은 하나의 효과이다. 이제 영혼은 유사하게 별빛의 광선들이 지구를 비추어 서로를 형성하는 각(角)들의 조화로운 비율에 특유한 반응성을 가진다고 말해진다. 케플러의 의견으로는 점성술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이 점이다. 그에 따르면 별들은 어떤 특별히 멀리 떨어진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실제 거리는 점성술에서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그 광선만이 효과를 갖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본능을 통해 의식적인 숙고 없이도 조화로운 비율에 대해서 안다. 영혼은 그 원 모양의 형상 덕택으로, 신의 하나의 이미지이고 그로부터 따라 나오는 비율과 기하학적 진리가 영원으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영혼은 그 원 모양의 형상의 결과로서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광선 형태의 외형에 의해 각인되고 탄생되던 그 때부터 그것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다. --- p.253
현대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은 다시 측정을 통한 현상의 교란 요인을 강조하고(다음 절을 참고), 현대 심리학은 재차 집단적(collective, ‘objective’) 정신의 과정을 인식하기 위해 상징적 이미지를 원재료(특별히 꿈과 환상에서 자발적으로 기원한 것들)로 사용한다. 그래서 물리학과 심리학은 또다시 현대인들을 위하여 양(量)과 질(質) 사이의 오래된 대조를 되돌아본다. 하지만 케플러와 플러드의 시대 이래 이 대조되는 정반대의 극(極, poles)들을 타개할 가능성은 그나마 덜 희박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현대 물리학의 상보성의 관념은 새로운 종류의 종합으로, 우리에게 오래된 대조를 이루는 개념들(입자와 파동과 같은)을 적용하는 데서 생기는 모순은 결국 명백할 뿐이라는 것, 다른 한편 융 심리학에서 과거 연금술적 관념의 사용 적합성은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동시발생의 어떤 매우 깊은 통합을 지적한다. 우리에게 케플러와 플러드 두 사람과는 달리 유일하게 인정할 수 있는 관점은 실재의 두 측면들을, 곧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 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을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들을 동시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 p.285
우리는 어떻게 연금술뿐만 아니라 천동설적인 관념 역시 앎의 과정이 지식을 얻은 사람이 겪은 변성에 대한 종교적 경험과 연관되는 방식에 관해서 그 문제에 대한 하나의 교훈적인 예를 갖추고 있는지를 보았었다. 이 연관은 경험의 정서적 측면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현대적 지식의 총합과 인지의 실제적 과정과의 생동감 있는 관계에 놓여 있는 상징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 시대에 그러한 상징의 가능성은 어떤 소외된 관념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 고전역학이라 불리는 것의 개념들이 낯설게 되는 시대 그러나 동시적으로 종교적이고 과학적인 기능을 가진 어떤 상징의 존재를 입증하도록 해주는 또 다른 시대를 검토하는 것이 특별히 흥미롭게 생각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