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덴마크어로 출간된 이 책 [불안과 함께 살아가기(Begrebet Angst hos Søren Kierkegaard)]는―이후 독일어, 영어, 네델란드어 번역본이 나왔는데―키에르케고어의 통찰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첫걸음이다. 이 책에서 나는 [불안의 개념]을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논고로서―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을 빌자면 인간의 “어려운 자유(difficile liberte)”에 관한 논고로서―이해하면서, 독자들에게 키에르케고어의 사유를 주제적으로 소개하고자 했다. 좀 더 상세히 말해서 내가 주안점으로 삼은 것은, 주관성이 시간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내면성은 (내적으로 갇혀 있는 것과는 반대로) 행위와 이해의 내면성이라는 사실, 즉 인간의 자기관계와 타자에 대한 연관이 늘 함께 얽혀 있는 내면성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키에르케고어의 사유를 해석하면서 그의 역사 개념을 강한 의미로, 즉 개별자의 역사와 집단의 역사, 개인의 역사와 공동의 역사가 상호 침투하고 있다는 강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마찬가지로 개개인으로서의 우리를 서로 결합시켜 주는 것에 대한 개념도 강한 의미로 해석하였다. 아울러 윤리적 차원과 종교적 차원에 대해 논의할 때, 나는 키에르케고어가 비판적으로 구별하고 있는 제1의 윤리학과 제2의 윤리학을 각별히 강조하였다. 예전의 키에르케고어 수용에서 이 두 윤리학의 구별은 거의 전적으로 경시되었었다. ---「한국어판 서언」중에서
“모호성은 이미 주어진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상황이 애매하거나 확정되지 않았고, 어떤 결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데에 놓여 있는 것이다. (......)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서 상황이 우리에게 닥쳐오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 자신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결국 모호성은 인간이 불안 속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서게 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기 자신(Selbst)으로서 자신 앞에 서는 것이다. 언제든 또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신으로서 말이다.” --- p.49
“인간의 실존함은 두 가지 근본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로 인간은 실존하는 자로서 진행되는 과정 속에, 생성의 과정 속에 있다. 둘째로 인간은 스스로 실존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의 문제 혹은 과제에 직면해 있는 셈이데, 이는 인간이 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맺음] 속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생성 중에 있으며 자기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근본적인 특징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과제 속에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 p.130~131
“[죽음에 이르는 병]은 불안의 분석을 통해서 얻은 통찰을 계속 견지한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의 종합 혹은 이질적 요소들 간의 관계라는 것이다. 이질적 요소들 간의 관계이기에 이들 사이의 연관성은 깨지기 쉽고 항상 위험에 처해 있다. 제3의 항으로서의 자기가 의미하는 것은, 스스로 이렇게 통일되지 않은 것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즉 영혼과 육체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유한하면서 무한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시간적이면서 영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질적 요소들 간의 연관성이 이와 같은 자기관계 속에 놓여 있거나 혹은 그러한 연관성이 자기관계 자체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란 두 가지를 뜻한다.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것이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자기 자신과의 연관성이기도 한 것이다.” --- p.191
“개별자는 종합으로서의 존재에서 비롯되는 과제 앞에 서 있으며, 이를 통해 역사를 갖게 된다. 개별자의 역사는 종합이 모순으로서 정립되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다. 이 말은 개별자가 자기 자신을 하나의 문제로서 의식하게 되는 순간―혹은 자기 자신과의 연관성을 하나의 문제로서 의식하게 되는 순간―, 이 순간에 그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과제는 자기 자신과의 연관성을 갖게 되는 것, 달리 말해서 자기 자신과의 연속성과 정체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개별자의 역사란 이러한 과제의 역사인 것이다. (......)
따라서 개별자의 역사를 가리키는 역사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과제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어에게 이러한 과제는 윤리적 차원의 개념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역사가 이제 윤리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독자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키에르케고어에 대한 통상적인 견해는, 그가 역사에 대해 어떠한 진정한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으며, 어떤 경우에든 역사적 차원과 윤리적 차원을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간주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 p.247~248
“역설이 모순적인 것은, 역설이 지성의 생각과 기대를 뒤집어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이 통상적으로 자신의 현존에 질서를 부여할 때 따르고 있는 생각과 기대를 뒤집는 것이다. 예를 들어 허약함과 강함, 권력과 무기력, 부와 가난, 높은 지위와 낮은 지위, 상실과 획득 등의 구별에 존재하는 관계를 뒤집는다. (......)
키에르케고어는 믿음을 일종의 극단적인 결정으로서, 개별자가 의지할 것이 전혀 없이, 스스로 완전히 홀로 내리는 결정으로서 강조한다. 그가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그가 당대의 어떤 특정한 경향이 되고 있는 것을 공격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누구나 손쉽게 합류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다. 마치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속하게 되는 특정한 문화처럼 말이다. 이와 달리 믿음은 자기 자신을 경유하여 개별자가 내리는 결단인 것이다.“
--- p.317~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