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제의 글 「시간들의 교차로에서: 아픈 사람, 퀴어, 장애의 시간」은 크론병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하루 이야기를 통해 ‘표준’의 시간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장애의 시간이 “미래 없음의 위협 안에서 순간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퀴어의 시간’, 그리고 “시간 자체를 재고하게” 하는 ‘불구의 시간’과 온몸으로 교차하면서, 장애인의 일상이 이른바 (정상인)의 시간을 얼마나 비정상적인 폭력으로서 직면하는지를 드러낸다.
박희주의 글 「멸망을 겪은 자들이 그리는 미래: 아시안 퓨처리즘과 라티노/라티나 퓨처리즘에 대하여」는 오늘날 북미에서 인종적 소수자의 시선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SF 이야기들이 폭발하고 있으며, 이는 이미 식민 지배와 같은 디스토피아와 파멸을 겪은 사람의 관점에서 백인·남성·이성애 중심의 현실과 SF 사이의 경계선이 과연 얼마나 자명할 수 있는지를 심문한다고 말한다.
이원진의 글 「K-정치좀비물의 기원을 찾아서: 순종의 열망과 잡종의 변이 혁명」은 최근 한국 판타지 드라마에 몸과 몸의 접촉을 통하여 이승과 저승, 현대와 과거를 소통시키며 인민의 고통을 풀어 주는 샤머니즘적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특히 드라마 ?킹덤?에서 입만 남은 인민 좀비의 몸이 ‘밥이 하늘님’인 세상으로 돌진하는 것, 좀비이되 다른 세상을 꿈꾸는 좀비로 부활하는 것, ‘순수혈통’의 위계를 고집하는 민족-국가의 권력에 맞서 “잡것(천것)의 변이”를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조성환의 글 「동학·천도교의 생명미래주의(biofuturism): 최시형의 향아설위와 김기전의 어린이론을 중심으로」는 ‘동학(천도교)에서 어린이운동을 하는 철학적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흥미로운 물음에서 출발하여, 동학(천도교)에서 말하는 개벽은 김기전의 미래주의와 최시형의 생명주의가 접합하는 지점이라는 데 착안하여, 미래가 생명을 열고 생명이 미래를 연다는 뜻의 ‘생명미래주의’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김대식의 글 「지금은 ‘생태적 시간’이 요청되는 때!」는 한국 민중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바라본 함석헌의 역사관에 근거하여, 인간 주체의 한계를 인식하는 자연적 시간과 비소유(非所有)를 지향하는 아나키적 시간을 모색한다. 자연적·아나키적 시간은 각기 고유한 생명을 느리게, 게으르게, 자유로이, 오롯이 누리는 ‘짬’ 속에서 자기 주변의 이웃과 자연을 돌아보며 그들의 고난을 함께 경험하는 생태적 시간이 된다.
정혜정의 글 「분단의 시간, 북한의 ‘반제(反帝)’와 ‘주체(主體)’」는 8·15 해방 이후로 남한과 다른 빛깔의 시간을 통과해 온 북한의 시간의 특성을 거침없고도 정확한 필치로 짚어 낸다. 미국·일본에 맞서려는 반제국주의와 중국·러시아로부터 독립하려는 반대국주의(反大國主義)를 통하여 주체적 민족성을 지키고자 하였던 북한의 시간은, 서구 근대 자본주의 문명 아래의 정신적 식민화에서 아직 충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남한의 시간에 새로운 통찰의 화두를 던진다.
김지우의 글 「나를 반성하다: ‘함께 철학’을 통한 나의 개벽」은 지금까지 타자를 객체로 여기며 나 자신의 독단적 자유를 추구해 온 코기토적 개인주의, 그리고 투쟁과 폭력을 통한 발전이 가장 훌륭하다는 서구적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것이 곧 나의 개벽이며, 그 개벽의 씨앗이 한국철학사에 담겨 있음을 깨달아 간 과정의 기록이다.
홍박승진의 글 「방정환의 동시(童詩)와 동학의 자연사상」은 성인 중심의 문학사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생명이 생명을 끝없이 살리는 우주 자연의 내재적 신성이 어린이의 마음속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는 동학의 관점이 어린이주의적 문학사 모색의 사상적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다시말하다?에서는 SF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셰릴 빈트(Sherryl Vint) 교수가 그의 제자이자 본지 편집위원인 유상근과 나눈 대담을 담았다. 이 대담에서 빈트는 SF가 과학기술의 변화에 따른 삶의 변화를 드러낼 수 있으며, 사변문학이 미래의 사회 구조에 관한 사고 실험을 수행함으로써 페미니즘처럼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김현숙이 옮긴 이돈화의 글 「문화주의와 인격상 평등」(1920)은, 이돈화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의 평가, 즉 ‘일본 문화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와 달리, 이돈화가 단지 문화주의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만인의 하향평준화를 넘어서 만인의 생명 도약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는 점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박길수와 조성환이 옮긴 이관의 글 「종교는 철학의 어머니」(1910)는 유심론 철학과 유물론 철학 각각의 폐단을 지적하며 그 원인이 종교에 근거하지 않고 방향성을 잃어 지엽말단에 천착한 탓이라고 하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통찰을 던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