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건국 당시의 한국경제는 국제적으로 천덕꾸러기였다. 워낙 가난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아슬아슬한 붕괴 위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문가들 말대로라면 한국경제는 이미 망해도 여러 차례 망해야 했다. 선진국이나 국제기구의 충고를 무시하고 한국식을 고집한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오늘의 한국경제는 세계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경제발전은 물론 정치 민주화까지 이뤄낸 점이 더 주목을 끌었다. 이런 한국경제가 개발도상국들에는 교과서로 통한다. 최근의 경제위기를 맞아 내로라던 강대국들도 한국 경험을 벤치마킹하는 데 서슴지 않는다. 과연 한국경제의 성장 비결은 무엇일까?
우리는 막상 우리를 잘 모른다. 대학의 경제학과에서도 미국에서 유행하는 이론을 가르치기만 할 뿐, 제 나라 경제가 무슨 고초를 겪고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는 관심 밖이다. 경제학을 전공하나 영문학을 공부하나 한국경제를 잘 모르기는 별 차이가 없다.
한국경제는 ‘사람’을 빼고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원래 경제는 사람이 핵심이다. 더욱이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이 오로지 사람만을 유일한 밑천으로 삼아 오늘의 경제를 일궈냈다. 특히 역대 대통령의 리더십을 거론하지 않고서는 건국 이후 한국경제의 발전과정을 논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경제치적을 시대별로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한국경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p.8~9
2004년 11월, 남미를 순방한 노무현은 칠레 산티아고 동포간담회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남미 여러 나라를 돌면서 왜 한국이 성공했을까 많이 생각했다. 옛날 지도자들이 실책을 더러 했지만 그래도 한가지씩은 다 했다. 자유당 시대를 독재시대, 암흑시대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당시 토지개혁은 정말 획기적이고 역사를 바꾼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토지개혁 덕분에 6·25전쟁이 터졌는데도 국가 독립과 안정을 지켜냈고 국민이 하나로 뭉쳐서 체제를 지켜냈다.”
노무현이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두고 한 말이다. 독재자로만 알았던 이승만이 알고 보니 토지개혁 같은 대단한 업적을 남겼더라는 이야기다. 남미 국가들의 토지 제도를 직접 보면서, 거기에다 한국 현실을 대입시켜 본 소감을 그렇게 피력한 것이다. 이승만의 토지개혁이 과연 어떤 정책이었기에 정치적 성향이 전혀 다른 노무현 대통령이 이토록 칭송했던 것일까.
토지개혁은 북한이 남한보다 먼저 실시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 소련군 주도로 다른 공산국가들처럼 모든 토지를 몰수해서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줬다. 소위 말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한 것이다. 농민들은 일시에 소작농이 없어져서 환호했으나 땅 임자는 어디까지나 국가였다. 땅뿐 아니라 심지어 가축들까지도 국유화했다.
남한도 해방 이후 토지개혁(남한은 농지만을 대상으로 했다)에 대한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으나 개인의 재산권이 걸려 있는 문제인지라 시비가 많았다. 미군은 소련과 기본적으로 생각이 달랐다. 토지개혁은 필요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유재산제도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p.33~34
박정희 경제를 산업화라는 용어만으로 담아내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는 공장을 짓고 다리만 놓은 것이 아니라, 쌀의 다수확 품종을 개발시켜 주식 자급을 이룩했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나 대덕연구 단지를 만들어 오늘의 기술입국에 초석을 닦았다. 국세청을 통해 세금 걷은 제도를 만들었고, 복지 정책으로 의료보험제도를 처음 시작했다. 오늘날 한국 정부의 기본 틀이 박정희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박정희가 무엇을 이룩했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했는지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군 사령관 출신답게 초장부터 전쟁하듯이 밀어붙였다. 판단과 집행이 빨랐고, 수많은 비판과 반대, 부작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과감하게 부수고 바꿨다.
초기의 박정희는 공장 건설에 몰두한 프로젝트 매니저 같았다. 외국 차관으로 시멘트 공장, 비료 공장, 정유 공장, 제철 공장 등을 서둘러 짓는 일에 전력투구했다. 필요하면 기업 총수들을 수시로 불러 담판을 지었고, 말단 공무원이라도 아이디어만 좋으면 직접 상대했다. 경제개발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필요한 공장만 계획대로 지을 수 있다면 웬만한 허물이나 부정을 고발하는 투서가 들어와도 모른 척 했다.
판단하는 과정은 신중했지만 일단 결심이 서면 반대를 허용치 않았다. 반대를 물리치는 독단적 정책결정 과정이 많은 논란과 부작용도 불렀다.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 포항제철이나 경부고속도로 건설처럼 박정희의 용기와 결단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일도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탄압으로 반대 세력을 부당하게 억압했던 부정적 측면 또한 엄연한 사실이었다.--- p.138~139
한국경제의 만성적인 현상이었던 인플레이션을 퇴치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전두환의 업적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런 목표가 달성되리라 예상했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독재자가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경우는 많아도 인플레이션을 잡은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드물다. 박정희 시대에서 시동은 걸었으나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던 안정화 정책은 전두환 시대로 넘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원래 국민이 가장 꺼리는 경제 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긴축 정책이다. 결과적으로 물가가 안정되는 것은 좋지만,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돈줄을 조이거나 임금을 억제하는 정책은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집권 초기부터 강력하게 은행 돈줄을 조이는 한편 정부 스스로도 예산을 쥐어짰고, 기업들한테는 임금 억제를 강요했다. 노조도 강력한 탄압 속에 정부 정책에 고분고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임금이 오르고 물가가 더 오르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경제교육을 전 국민이 귀가 따갑게 들어야 했다. 1980년의 도매물가 상승률은 제2차 석유파동까지 겹쳐 무려 42.3%나 됐다. 이런 물가상승률을 한 자리 숫자로 낮추겠다는 것이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주도한 전두환 정권의 목표였다.
언론이나 경제학자들은 ‘한자릿수 물가’를 두고 꿈같은 소리라며 코웃음을 쳤다. 경제기획원의 물가정책국 실무자들마저도 1981년의 물가억제 목표를 잘해야 20% 정도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통계로 나타난 실적은 뜻밖이었다. 소비
자 물가 기준으로 1981년에 13.8%를 기록하더니, 1982년에는 2.4%, 1983년에는 -0.8%로까지 떨어졌다. 상상도 못하던 일이 현실로 벌어진 것이다. 비록 반대와 비판을 봉쇄한 가운데 독재의 힘으로 밀어붙였다 해도, 정부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는 비인기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한 끝에 이 같은 결실을 일궈낸 셈이다.
--- p.149~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