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침몰과 구조 실패의 영역으로 한정된다면 우리의 일기는 그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두 사람은 세월호 참사가 그 이상의, 이 사회 곳곳에 웅크리고 있던 질곡과 민낯을 드러낸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이라고 믿는다.
또한 참사는 2014년 4월에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 유가족, 생존자, 잠수사, 공무원, 정치인, 학교 교사, 현장 활동가, 의료전문가, 학자, 나아가 전국 곳곳의 국민이 생각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며 새롭게 관계 맺도록 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 방식이 긍정적인 방식이든 혹은 부정적인 방식이든 말이다. 이 일기는 그러한 변화와 움직임의 아주 작은 부분을 기록하고 보고하는 데 불과하지만 우리는 이 자료들이 조금이나마 참사와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프롤로그」중에서
“여러분들은 내가, 선생님이 뭐라고 한다고, 그 말대로 따르지 마세요.”
---「2014년 4월 24일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리본 나눔」중에서
무책임한 개인의 태도를 어찌 비정규직이나 신자유주의의 문제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을까?
---「2014년 4월 29일 비정규직 선장의 무책임」중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지식인으로서, 도대체 이 나라의 무엇을 제대로 감독하거나 책임지거나 바꾸어왔는가?
---「2014년 5월 1일 기억하겠습니다, 애쓰겠습니다, 약속합니다」중에서
국가에게 사람들은 그저 숫자일 뿐이었다. 통계적 자료에 불과했다.
---「2014년 5월 2일 안산트라우마센터 첫 방문, 숫자화된 희생자들」중에서
세월호 시민아카이브 네트워크를 본격적으로 해야겠다는 확신이 든다. 피해자 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잊히는 것이다. 그들의 두려움을 덜어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사회적 기억을 유지하고 확산하는 것만이 왜곡된 구조까지 치유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다.
---「2014년 5월 17일 시민아카이브의 희망」중에서
학자의 사회 참여란 무엇일까? 현장을 조사하고 기록을 모으며, 그 안에 알알이 박힌 마음들을 글을 통해 모두와 나누는 일 아닐까…. 내 몸에 붙은 ‘전문성’과 ‘이론적 틀’들은 현상의 배면에 자리한 인식과 지층을 파열시키는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 내는데 유용한 도구들일 뿐이다. 이곳 진도체육관의 울림에 귀 기울이되 학자로서의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2014년 5월 28일 학자의 길」중에서
내가 생각할 때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기본적인 요소 중 한 가지는 최소한 자신이 그곳에 속해 있다는 귀속감,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심리적인 지지이다. 만일 내가 그곳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없다면, 그곳은 결코 그 사람에게 ‘공동체’로 인식될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지리적인 공간의 공유를 공동체 혹은 귀속감의 일차적인 요인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세월호 유가족을 보면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4년 8월 10일 반별 모임과 농성 공동체」중에서
인류학에서는 언젠가부터 진실을 소문자에 복수형인 ‘truths’로 사용해왔다.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기보다는 사람의 경험과 관점에 따라 다양한 진실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발표에서 대문자 ‘Truth’를 사용했으며, 실제로 ‘진실’이라는 것이 있다고 ‘강조해서’ 말했다. 단지 우리는 그 ‘대문자 진실’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인류학적 관점과는 어긋나는 것이지만 나는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말하면서 그것을 믿었다.
---「2014년 10월 17일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발표」중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유가족이나 시민 세력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하늘에 있는 아이들은 이러한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여 4.16운동이 현재 정권과의 정치적 싸움으로 환원되어 버리지 않도록, 또는 오랜 기간 습관화된 운동의 관성 속에 파묻혀버리지 않도록, 나는 늘 억울하게 세상과 작별해야 했던 그 아이들을 먼저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래야만 4.16운동은 그 이전과는 다른 변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
---「2015년 1월 16일 추모관이 된 교실」중에서
세월호 참사가 정말 국가 혹은 정부만의 문제인 것일까?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이, 일상이 변화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2015년 6월 22일 유가족 엄마들의 책 읽기 모임」중에서
변화란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그렇지만 노력이 쌓여야 언젠가 이루어지는 것이 변화이기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2016년 8월 20일 눈물의 이별, 기억교실 이전식」중에서
그날 사람들 모두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외쳤지만 세월호는 대중들에게 점점 잊히고 있다. 유가족들은 단 한 번의 승리 경험 없이 계속되는 실패에 지쳐가고, 이제는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것 같다.
---「2016년 10월 14일 김종철 기자와 기획기사 논의」중에서
4.16 기억저장소에 열람하는 장소를 두어 관심 있는 분들이 찾아오면 본인의 실명과 소속을 적어두고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복사나 외부 반출을 금지하고, 혹시라도 온라인상에 내용이 왜곡되어 공개되거나 맥락과 상관없이 일부만 발췌돼 오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지 궁금하다. 그간 부지런히 해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공개 시기가 너무 늦었고, 또 공개하는 방식이 너무 편협하지는 않은지 걱정이 된다.
---「2016년 11월 21일 구술기록집 열람 개시」중에서
무엇보다 ‘전원 구조’라는 오보는 희생자 가족뿐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잊지 못할 기억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 오보는 이미 배가 거의 침몰하고 구조가 불가능한 시점에 나왔기 때문에 현장에서의 구조 상황을 크게 바꿀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사가 팽목항으로 내려가던 버스 안의 부모들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을 기대하고 가슴 졸이게 했는지 생각하면 잘못의 크기는 도저히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세월호를 겪으며 상처받은 기자들이 만들어나갈 앞으로의 언론은 조금은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2016년 12월 16일 SBS 류란 기자와의 만남」중에서
2017년 3월 이후 지금까지 이현정 교수는 트라우마센터인 안산 온마음센터의 자문위원장으로서, 나는 기억저장소의 운영위원으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책을 냈다고 세월호 참사와 나의 삶의 관계가 마무리될 수는 없다. 나의 자리에서 나의 역할을 하며 나의 삶을 살아내야 하니, 앞으로도 일상 전부를 세월호 참사 관련 일에 투여하는 것이 답은 아니겠지. 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는 확실하다. 하나는 나의 자리로 돌아간다 해도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의 자리가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세월호 참사가 제대로 알게 해준 세상과의 대면 방식 역시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