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여성, 아동, 그리고 다른 남성에 대한 남성 폭력은 심각한 문제이다. 모든 여성의 3분의 1에서 2분의 1이 평생 한 번은 신체적?성적 학대를 당한다.……대부분의 기독교 교회는 최근까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다. 아동과 가족을 위한 사회적 정의에 평범한 수준의 관심을 쏟은 것 외에는, 20세기가 끝날 때까지 실질적으로 남성 폭력에 관한 심도 있는 신학적 숙고가 없었다. (11쪽, 들어가며)
남성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폭력을 휘두른 남성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보통 대중은 그러한 폭력이 매우 드문 일이며,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 안에서 더욱 그러하다고 여긴다. 대중은 다른 집단에 속한 수상한 사람에게 공격을 받거나, 강도질을 당하거나, 도둑을 맞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은 경계하면서도 자신이 속한 집단 안에서는 그러한 폭력에 직면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폭력은 같은 사회 집단과 가족 내부의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난다. (28쪽, 제1장 여성과 아동에 대한 남성 폭력)
이 이야기는 거대한 악을 행할 수도 있고 위대한 용기를 발휘할 수도 있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다. 암논은 욕망에 굴복했다.……반면 다말은 자신이 악에 직면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기 자신의 온전함을 위해 싸웠다. 다윗은 비겁했다. 압살롬은 다말을 위해 충실하게 행동했지만……기만적이었다. 이 이야기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비극이다. 인간의 선 대부분이 악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85쪽, 제3장 윤리적 문제로서 남성 폭력을 이해하기)
학대를 경험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정을 위한 목회적 돌봄의 첫 번째 원칙은 희생자의 안전이다.……가장 약한 사람의 안전에 중점을 두는 것이 목회적 돌봄의 합당한 원칙임에도, 누군가가 흑인 교회나 흑인 공동체의 저명한 지도자에게 항의할 때마다 이 원칙은 자주 위반되었다. 많은 교회는 신뢰받는 지위에 있는 가해자의 합리화를 믿고 배신당한 피해자의 호소를 묵살한다. (92쪽, 제4장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대 희생자 및 생존자와 함께하는 목회적 돌봄)
그러나 아동 성추행범을 상대하면서 악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인간성 파괴의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순진한 교리를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동 성학대에서 악은 너무나도 두드러지기에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간단한 개념에도 의문을 품게 된다. 아동을 강간한 남성의 삶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악은 한계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악의 통제를 당할 때, 인간 고통의 비극은 극심해진다. 우리가 성폭력의 결과를 온전히 직면하는 순간, 하나님 안에서의 악과 선의 관계는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된다. (132쪽, 제6장 회복하는 가해자의 이야기들)
비록 도라에 대한 프로이트의 사회적 힘이 절대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회적 지위는 그를 억압자로 만들었다.……그는 남성, 중년, 명망 있는 의사, 상류층, 과학적인 저술가, 상대적으로 부유한 자였다. 도라 역시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일정한 사회적 계급을 부여받았지만, 그녀는 십대 소녀, 여성, 병증을 보이는 환자이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의사였으며, 의사에게는 환자가 내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이 사례의 경우, 한 인생의 심리적 동기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당시 태동하기 시작한 과학적 인류학에서 발견한 것들을 가르쳐줄 책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를 찾았던 수많은 고객들과 제자들은 정신분석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개인적?사회적 힘을 얻었다. (184쪽, 제7장 프로이트, 여성, 그리고 남성 지배)
일부 생존자들은 자비로운 예수에게서 위로를 발견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라는 그의 명령에 혼란스러워 한다. 결국, 종교는 그들에게 억압에 대한 반항과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용서, 겸손, 복종, 그리고 희생을 명령하는 것이다. 여성 생존자들은 하나님, 그리스도론,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를 수정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217쪽, 제8장 예수의 이름으로 폭력에 저항하기)
복음의 설교자들은 마치 교인들 사이에 폭력의 생존자와 가해자가 전혀 없는 것처럼 설교를 해왔다. 그래서 가정에서 폭력을 경험한 이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설교를 듣지 못했다. 생존자와 가해자들은 모든 교인들이 연루된 문제인 가정 폭력에 관한 명확한 윤리적 지침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교인들 사이에 가정 폭력의 생존자와 희생자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 하나님은 폭력을 싫어한다는 것, 따라서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45쪽, 제10장 진실 말하기)
많은 기독교인은 용서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설령 용서가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모두에게 고르게 적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공동체는 약자가 용서함으로써 자신들을 흡족하게 만들어주길 기대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강자를 책임으로부터 보호한다. 용서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력한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교회가 남성 폭력과 결탁하도록 만든다. (269쪽 제11장 벌써 용서할 시간인가? 용서에 관한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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