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이야’ 같은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어쩌면 그런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일지 모른다. 흔히 향수(nostalgia)라고 일컫는 아련한 감각은 선물과 같아서 ‘아름다운 시절’의 ‘아름다운’은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붙일 수 있는 수식어이며 ‘되돌릴 수 없음’은 추억의 미덕이 되어 그 기억을 연료 삼아 현재의 삶을 구동시키고는 한다. 그러므로 모든 지난날은 아름다운 시절일 수밖에 없다. 그리울 권리가 있는 과거가 있음은 고마운 일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미래의 언젠가를 태우기 위한 월동 준비라는 의미가 될 테니.
--- 「03. 그리울 권리」 중에서
당연한 말이지만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은 없다. 물론 모든 건 언젠가 지나가지만 통과 속도는 모두에게 공평할지라도 불행의 반경과 행복의 구심은 저마다 달라 허리에 양손을 얹고서 해맑게 웃으며 ‘이제 다 지나갔어!’라고 읊조릴 수 있는 순간이 차례로 다가오진 않았다. 다만, 교훈이 남았다. 어떤 방식이 되었건 그 상황을 해결(극복)해야 하는 건 오롯한 나의 몫이라는 것, 세상에 대가나 이유가 없는 요행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훈이. 만일 내가 엎어져 무릎과 턱이 까져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어떤 존재가 내게 친절을 베풀었다면 감사한 일임과 동시에 그건 빚이다. 이자 한 푼 붙이지 않고 내게 꾸어 준 친절이 그토록 은혜로운 일임을 깨닫는 과정에서 내가 진 호의라는 부채를 베푼 당사자에게 갚을 수도 있겠으나 언젠가의 나처럼 연쇄적인 불행의 폭격에 힘겨워하는 누군가에게 다정함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실천해야 할 덕목임을 배웠다.
--- 「06. 행운의 총량, 불행의 잔량」 중에서
하나를 잃고 절망하는 순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다른 이로운 한 면이 반짝, 하고 내 시야에 담긴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겐 저마다 ‘끝’이 있어 쇠락과 소멸을 향해 굴러가고 있다지만 많은 사람이 순응보단 극복이란 이름의 역방향을 택한다. 역방향으로 뒤돌아서 어깨를 들이밀며 그 속에서 가치로운 것과 의미로운 것들이 내게 건네는 행복의 맛을 혀끝으로 핥는 방법을 깨우친다. 놀랍지 않은가! 살면서 신앙처럼 읊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문장이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 「09. 엔트로피인가 제로섬인가」 중에서
길모퉁이의 담벼락을 꽈악 붙들고 있는 담쟁이덩굴의 초록과 하마터면 지나쳤을지 모를 보도블록 사이에 피어난 작고 노란 꽃, 땅만 보고 걷는 동안엔 결코 목격이 불가능한 기적 같은 붉은 석양의 순간, 소매 틈으로 파고든 자애로운 바람 한 줄기, 그런 것들을 발견하는 날엔 사는 일이 잠시나마 순전하게 기뻤다. 그 어느 것도 놓고 싶지 않은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어느 하나를 두고 간 자리에는 교훈이 남는다. 전부를 가지진 못했으나 오늘이란 시간이 건네준 교훈을 발견하는 건 나의 몫이며, 포춘 쿠키를 꺼내기 전까진 무어라 써 있는지 알 수 없어도 그 교훈이 내게 유효한지 알게 되는 건 쿠키를 부수고 쪽지를 꺼낸 미래 시제의 나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치를 하고 생수를 한 컵 마신 후 겸허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기로 한다.
--- 「18. 오늘이란 시간이 건네준 교훈」 중에서
마음이 홀연 추워진 날 고개를 돌렸을 때 누군가의 왼쪽 어깨가 보이고, 그 둥근 어깨에 잠시라도 내 머리를 얹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 사람의 셔츠 소매나 블라우스의 레이스가 내 눈물로 몽땅 젖어 가도 탓하지 않는 상대라면야. 신기하게도 그러면 오래 울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니 이제부턴 나도 괜찮으려 한다. 당장 행복이어서가 아니라 더 불행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겐 기대도 될 만한 둥근 어깨가 제법 있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둥근 어깨가 되어 주고 싶다.
--- 「32. 둥근 어깨의 힘」 중에서
힘들어도 자기가 어지른 장소를 제 손으로 처리할 줄 알게 되는 일을 성장이라 한다. 자기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을 피하려고만 하면 마흔 아닌 쉰을 넘겨도 어른이라 불러 주기 곤란하다.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쥐고 있던 사탕을 손에서 놓쳤을 때 드러나게 되는데, 어른은 사탕이 없어져도 견디며 살(아가려 노력하)지만 아이는 바닥에 드러누워 손발을 마구 휘젓고 짐승처럼 운다. 하기야 그 모습마저 애처롭고 귀여워 보이면 누군가 다가와 새 사탕을 쥐여 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몸집은 커졌으면서도 멘탈은 아이로 박제해 두는 영악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마음과 몸이 동시적으로 통하는 관계 맺음이 무엇인지 아는, 또 그게 가능한 어른으로 사는 삶, 내 감정과 의젓하게 마주할 줄 아는 삶이 내가 원하는 삶이다. 도망치지 않을 용기야말로 어른의 영역이며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야 한다면 마음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좌표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어른과 함께이고 싶다.
--- 「35. 의젓하게 마주할 줄 아는 삶」 중에서
어떤 상대에게 품고 있던 막연한 호기심이 호감의 단계를 거쳐 명확한 관계의 이름을 획득하는 ‘맺음’의 항목에 도달한 후, 최초의 나를 두근거리게 하던 호감이 어느덧 안락함으로 변모하게 되는 과정이 연애의 정방향이라면 이때 우리가 가장 우려해야 할 모습은 ‘편한’ 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서 변곡된 숙성 과정을 거쳐 ‘편리한’ 사이가 되어 버리는 일이 아닐까. ‘편리함’이라는 단어는 연인 관계에 있어선 유독 불손하게 쓰임에도 편리함의 굴레에 나태해진 커플은 결국 진득한 습지 위에서 서로 기대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질척이게 된다. 마치 지각하게 될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눈이 뜨이지 않는, 몸이 일으켜지지 않는 익숙한 침대 같다고나 할까. 침대에겐 원초적으로 죄가 없으나 침대를 그런 존재로 전락시킨 우리는 그렇게 상대의 삶에 크든 작든 빌런이 된다.
--- 「57. ‘편한’ 사이와 ‘편리한’ 사이」 중에서
좋은 연애는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하는 힘을 지녔다. 착한 마음을 먹게 하고, 즐거운 기분이 들며, 깨어 있는 순간이 기쁘고, 약한 것들을 보듬고 싶어지는 연애. 사랑이 아닐 수도 있고 사랑인지 모를 수도 있지만 상대가 나를 취할 때 전적으로 자기 ‘편의’ 쪽에만 하중이 실려 있고, 나와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시간(섹스든 식사든) 외의 영역에 상대를 조금도 들이지 않으려 하는 관계는 나쁜 연애다. 상대가 내게 제공하는 이익만 뽑아 먹고 싶은 것도 상호 간에 협의만 이루어져 있다면야 ‘거래’가 성립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세상 일이 어디 그리 간단하고 정의롭던가? 어느 쪽인가는 진심과 의리로 그 관계를 소중히 대하는데 다른 한쪽은 ‘척’을 하며 달콤한 꿀만 빨려 하니 문제지. 이건 연애도 뭣도 아닌 일종의 사기다.
--- 「60. 사라진 연애 감정을 찾아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