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조 시기가 언제쯤이냐는 논란과는 상관없이, 그 규모라든지 발굴 유물과 유적으로 보아 풍납토성이 왕성임에 틀림없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가장 흔히 들이대는 말이 백제가 하필 왜 홍수 우려가 큰 한강 바로 곁에다가 왕성을 만들었겠느냐는 말이다. 시제 이런 주장을 하는 문헌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꽤 있었다.
우선 이병도가 주목을 끈다. 1939년에 터무니없는 근거로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풍납토성은 하남위례성이 아니라 『삼국사기』'백제본기' 초기 기록에 두 번 모습을 보이는 사성(蛇城)이라고 주장한 대목은 이 책 뒤에서 집중 다루기로 한다.
그런데 이병도는 그가 집필을 맡은 1964년판 『서울특별시사』'고적편'에서 종전 이런 주장을 되풀이하며 그 근거를 더욱 보강하게 되는데,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 될 수 없는 근거 중 하나로 물난리를 피하기 힘든 지리적 조건을 들고 있다. 즉 풍납토성은 "수해를 초월할 만한 정도의 것이라고 하기 어렵고" "너무도 헤심심한 평지 하변(河邊)에 동떨어져 있는 감이 없지 않아 도성이 되기는 힘들다"고 하고 있다.
---p. 278-279
악명 높은 주말 서울의 교통 지옥을 뚫고서 광화문을 출발해 풍납토성 현장에 닿은 것은 1시간 가량이나 지나서였다. 도착해 보니 발굴 현장은 듣던 대로 곳곳이 파괴됐으며 방금 지나간듯한 포크레인 바퀴 자국 2줄기가 선명했다. 발굴 면적 1천 평 중 눈대중으로 보아 150평 가량이 피해를 봤다.
--- p.496
나는 이 점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여기에 풍납토성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한국고고학회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팔장만 끼고 있었노라고 고발장을 써둔다.
--- p.532
*백제 왕성 선입견과 몽촌토성
다시 말하거니와 몽촌토성은 그 대대적인 발굴과 복원에 즈음해서는 하남위례성의 유일한 후보처럼 군림했다. 물론 몽촌토성을 그렇게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몽촌토성=백제 왕성’이라는 학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주목해 주기 바란다.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고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창설한 김원룡이었다. 1964년 풍납토성 몇 군데에다가 구덩이를 파 보고 거기서 어떤 유물이 나왔는지를 분석한 김원룡은 1967년 그 결과를 앞에서 말한 보고서로 제출하는데, 여기서 말하기를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한 성 백제 멸망사실을 전하고 있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조에 등장하는 남성과 북성이라 했다.
--- p.28
*백제 왕성 선입견과 몽촌토성
다시 말하거니와 몽촌토성은 그 대대적인 발굴과 복원에 즈음해서는 하남위례성의 유일한 후보처럼 군림했다. 물론 몽촌토성을 그렇게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몽촌토성=백제 왕성’이라는 학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주목해 주기 바란다.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고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창설한 김원룡이었다. 1964년 풍납토성 몇 군데에다가 구덩이를 파 보고 거기서 어떤 유물이 나왔는지를 분석한 김원룡은 1967년 그 결과를 앞에서 말한 보고서로 제출하는데, 여기서 말하기를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한 성 백제 멸망사실을 전하고 있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조에 등장하는 남성과 북성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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