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다른 아이들과 같지 않은 어떤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의 이름은 ‘어린 왕자’다. 우리는 그 소년의 나이도 모른다. 가까스로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을 뿐이며(하지만 소행성 B612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 누구도 소년이 언젠가 지구로 돌아올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어린 왕자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른다. 어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답은 아주 간단해. 어린 왕자는 1943년 미국, 앙투안 생텍쥐페리의 책에서 태어났지.” ---「서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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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지만 슬픈 일도 적지 않았다. 아버지가 역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네 살이었다. 1917년에는 남동생 프랑수아가 관절 류머티즘 합병증으로 그의 팔에 안겨 영원히 잠들었다. 뒷날 그가 《전시조종사》에서 회상했듯이 “수증기 모터 한 개와 자전거 한 대, 그리고 소총 한 정”을 남긴 채 프랑수아는 열네 살에 앙투안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사랑하는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은 앙투안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때부터 그의 어린 시절은 더 이상 평온하지 않았다.
---「행복한 어린시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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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처럼 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앙투안의 소중한 꿈이었다. 그가 스스로 ‘하늘을 나는 기계’를 고안한 것은 채 열 살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마을 목수의 도움을 받아 그는 ‘돛 달린 자전거’를 만들었다. 나무로 틀을 만든 다음 그 안에 천을 넣고 바짝 당겨서 자전거 핸들에 묶었는데, 힘껏 페달을 밟으면 자전거가 잠깐 땅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전거가 구덩이에 박히면서 엔진은 작동을 멈췄다. 무릎이 벗겨지는 상처를 입었지만 그는 비행에 대한 열망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비행의 열정」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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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시작할 나이가 됐을 때부터 앙투안은 짧은 극본을 쓰고 어른들 앞에서 배우처럼 연기했다. 앙투안에게는 아주 일찍이 시작돼 평생 그를 떠나지 않은 습관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에게 느끼는 자신의 열정을 모두 글로 증명하려는 듯 앙투안은 어머니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내는 습관이 있었다. ---「초기의 편지, 초기의 글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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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작품은 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 이해돼야 한다. 그의 그림에는 글의 의미를 한껏 살리는 풍요로움이 넘치며, 시적 상상력과 유머도 담겨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글과 그림을 곁들인 《어린 왕자》는 그의 다양한 재능이 돋보이는, 가장 완전하고 정확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의 그림은 단순히 글에 삽화를 넣는 데 만족하기보다는 훨씬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화가 생텍쥐페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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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동안에는 좋은 책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글을 마치고 나면 전혀 가치가 없는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생텍쥐페리는 이처럼 그림뿐만 아니라 글쓰기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적이 의심했다. 그는 정규적인 문학수업을 받지 않은 자신이 작가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가 쓴 문장을 끊임없이 다시 고쳤다. 일부를 삭제하고, 휘갈겨 쓰고, 자신 외에 다른 사람들은 읽을 수 없는 글씨로 육필원고를 가득 채웠다. ---「생텍쥐페리와 글쓰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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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까지 앙투안은 어머니에게 편지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곤 했다. 스물두 살 때 앙투안은 “내가 슬플 때 당신은 나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하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3년 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내가 바라는 것은 안정이며, 당신의 사랑 같은 그런 사랑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여인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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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31일 8시 45분, 알프스 상공 정찰임무를 맡은 생텍쥐페리는 마지막 담배를 피운 뒤 서서히 기체에 올라 코르시카의 바스티아-보르고 기지를 떠났다. 하지만 몇 시간 뒤 그의 흔적이 사라졌고, 사람들은 다시는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언젠가 “나는 지중해에서 열십자로 죽을 것”이라고 선언했던 생텍쥐페리의 실종이었다.
이에 대해 수많은 가정이 제시되었다. 독일군 방공포에 맞았다는 가장 가능성이 큰 주장에서 독일 전투조종사와 교전 중 사망했다는 주장까지, 심지어 자살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1998년 9월, 마르세유의 한 어부가 그의 이름이 새겨진 팔찌를 발견했다. 2004년 4월 7일에는 전해 가을 리우섬 근방에서 발견된 P-38 기체 조각이 앙투안이 탔던 비행기의 잔해로 판명됐다. 그때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나이는 44세였다.
---「마지막 임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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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등장인물은 화가이자 작가 개인의 상상력에서 갑자기 나타난 피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연필을 만지작거리던 작가가 일생에 끊임없이 추구한 기나긴 그림 작업의 산물이다.
---「어린 왕자의 초벌 그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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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개 이상의 언어와 방언으로 쓰였고, 26개의 다른 철자로 옮겨진 《어린 왕자》는 세상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번역된 문학작품이다. 2,000개 언어로 번역된 《성경》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적 기록의 보유자지만, 《해리포터》는 그 엄청난 위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린 왕자》의 기록을 깨지 못했다. 조앤 롤링의 이 소설은 60개 정도의 언어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린 왕자》의 판본의 종류(대략 600가지) 와 판매부수(사람에 따라 3억에서 8억까지 천차만별)를 정확히 조사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 속의 《어린왕자》 : 번역」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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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저곳을 두루 다니면서 어린 왕 자는 “여기는 정말 이상한 별이야”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어린 왕자는 사막을 떠나 곧바로 히말라야로 갔다. 오래전부터 진짜 산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린 왕자가 자신이 살던 행성에서 소유한 세 개의 산은 가까스로 자기 무릎에 닿을 만큼 아주 낮았다. 하나는 사화산인데, 어린 왕자는 종종 의자에 앉듯 그 산 위에 걸터앉았다. 어린 왕자는 “이 산처럼 높은 산에 올라가서 나는 한눈에 온 인류를 둘러볼 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발표되지 않은 장」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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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지극히 사랑하는 한국 기업가 한홍섭(그는 프랑스를 50번 이상 방문했다!)이 마침내 ‘쁘띠프랑스’라는 이름의 이색적인 마을을 지어 프랑스를 향한 자신의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60킬로미터쯤 떨어진 가평호수 근처에 세워진 작은 마을 쁘띠프랑스의 여러 건물에서 우리는 프랑스 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350종에 이르는 번역서를 통해 한국인들과 매우 친한 어린 왕자 입상이 방문객을 환영하는 마을로 들어서면 등장인물을 표현한 벽화와 조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3층 건물은 상설전시관으로 생텍쥐페리의 삶과 작품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관람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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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수집가들 가운데 절대적 기록을 보유한 사람은 스위스 수집가 장-마르크 프로브스트다. 그는 1980년부터 270개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된 3,400종 이상의 각기 다른 판본들을 수집했다! 이뿐만 아니라 수많은 공연 프로그램과 포스터, 악보를 비롯한 잡지와 시나리오, 각종 시청각 자료들도 모았다.
그의 인터넷 사이트(www.petitprince-collection.com)는 어린 왕자와 관련된 모든 정보가 간직돼 있는 소중한 보고다. ---「수집가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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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그가 돌아올 것이다. 생텍쥐페리도 그에 대한 신비를 가슴에 품고 있다. “그가 돌아오면 나에게 즉시 편지를 보내주길 바란다”는 마지막 글에서 그 바람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린 왕자가 정말 떠났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독자들은 어린 왕자가 항상 그들 곁에, 그들의 상상의 주름 안에, 그들이 독서를 통해 가슴에 새긴 영원한 삶의 추억 안에 언제나 함께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보려면, 그가 귓가에 대고 “나에게 양 한 마리만 그려줘” 하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음성을 들으려면 지금 《어린 왕자》를 펼치는 것으로 충분하다.
---「결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