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국가는 유대인이 지배적인 종교와 종교적으로 대립해 존립하는 만큼이나 강력하게 그들이 그러한 압제를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나 유대인 역시 유대인의 방식으로만 국가에 관계할 수 있을 뿐이다. 즉, 그들은 이방인과 같은 태도로 국가에 관계할 뿐이다. (중략) 또한 그들은 유대인이 다른 인류와 구별되는 특별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정당한 것으로 착각하고, 역사적인 운동에 일절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인류의 보편적인 미래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미래를 고대하며, 자신을 유대 민족의 구성원으로, 유대 민족을 선택된 민족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 p.21, 「제1장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중에서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은 고유한 인간으로, 공민과 구별되는 인간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정치적 인간이 오직 추상화된, 인위적인 인간, 알레고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으로서의 인간인 반면, 시민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그는 감각적이고 개별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실존 안에서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현실적 인간은 이기적 개인의 형태를 통해서만 승인되고, 참다운 인간은 추상적 공민의 형태를 통해서만 승인된다.
--- p.61~62, 「제1장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중에서
유대인의 실질적 본질이 시민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현실화되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시민사회는 유대인에게 실천적 욕구의 관념적 직관에 불과한 유대교의 종교적 본질의 비현실성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모세오경 혹은 탈무드 안에서만 유대인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유대인의 본질을 발견한다. 우리는 오늘날 유대인의 본질을 추상적 본질로서가 아니라 최고의 경험적 본질로서 발견하고, 유대인의 편협뿐만 아니라 사회의 유대교적 편협으로서도 발견하는 것이다.
--- p.77, 「제2장 오늘날의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자유롭게 될 능력」 중에서
유대인 문제를 실체에서 양상으로, 유대인이 구성되는 메커니즘으로 이전시키는 마르크스의 관점과 분석을 염두에 둔다면,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를 반유대주의 혹은 유대인 혐오와 관련지어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글에서 발견되는 유대인 및 유대교에 대한 모든 비판과 혐오는 19세기 당시 막 발흥하기 시작한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혐오로 전치되며, 유대인은 바로 이 산업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결탁한 부산물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 p.109, 「해제: 3. 누가 반유대주의자인가」 중에서
마르크스가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각종 인권선언문과 헌법은 인권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 비추어 볼 때, 17~18세기에 철학적 자연권으로 선언되고 주창되었던 인권 이념이 법제화된 형태로 나타난, 인권 이념의 두 번째 발달 국면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인권 이념의 역사적 발달 과정을 설명하는 연구서는 대부분 그 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17~18세기 근대의 자연법 이론가들에 의해 구상된 철학적 자연권의 단계이고, 두 번째는 18세기 중반부터 유럽과 미합중국 일대에서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인권이 정치적·법적으로 현실화된 단계, 마지막은 1945년에 종전한 2차대전을 기점으로 인권이 국제적으로 유효한 법체계의 대상으로 부상한 단계다.
--- p.111, 「해제: 4. 추상적 인권 개념에서 구체적 인권 담론으로」 중에서
국민국가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과 지속적인 혐오 이면에서 우리는 모든 갈등의 불씨인 자본의 위력을 간파해야 한다. 유대인 권력의 근원을 그들 민족의 특정한 기질이나 그들의 종교에서 찾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자 문제의 해결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서유럽으로 이동한 이민자, 흑인, 여성, 이슬람교도에 대한 혐오와 이들을 향한 폭력의 근원 또한 그들의 피부색이나 독특한 문화적 관습이 아니다. 이 현상 이면에도 역시 화폐와 자본이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놓여 있다.
--- p.6, 「해제: 5. 오답들의 악순환을 멈추기 위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