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가며 알게 된 것은,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내가 목청 높여 무엇을 주장할 만한 주제가 못 된다는 자기응시를 하면서 글을 쓰는 일은 괴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글을 쓰는 동안 나는 희미하지만 질긴 끈으로 나와 연결되어 있는 타인의 삶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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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뭇거리며 조심스레 당신에게 말을 건넨다. 나의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로 공명될 수 있는 한 대목이라도 있기를 바란다고. 그래서 우리가 만나지 않더라도 어떤 풍경을 함께 보는 잠시의 순간이라도 나눌 수 있기를, 그것이 당신에게 깊이 내쉬고 들이쉬는 한 숨이라도 될 수 있기를 감히 소망한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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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가 된다는 것은 도망칠 수 없다는 뜻이다. 무서운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아무리 달려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 꿈처럼, 나는 내가 목격한 것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침묵을 지키며 보지 않은 척한다 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해도, 무엇인가를 본 이후는 그 이전과 같지 않다.
--- p.16
나는 달랐다.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은 삶이 곡진할수록 그 깊은 사연을 옮기기에 어눌하며, 글은 곧잘 더 말하거나 덜 말함으로써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데 실패한다고 생각했다. 잘 잊지 못하면서도, 잊지 못하는 것들을 기록하지 않았던 것은 말과 글이 도달하려는 것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p.18
내게 글쓰기는 오롯한 목표였던 적이 없다. 글을 쓰고 싶어서 글을 썼던 적도, 글쓰기가 행복했던 적도 없다. 그럼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외면하지 못해서이다.
--- p.19
장남 장손이 중요한 집안에서는 잘난 딸이 반갑기는 하지만, 그 딸보다는 아들이 더 잘나야 했다. 나와 동생은 그렇게 늘 붙어 있으면서 비교되는 존재였다. 나의 나다움, 동생의 동생다움은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 p.27
“잘될 거야”라는 말이 고민하는 사람 앞에는 오히려 무성의한 격려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의 걱정을 아무 말 없이 그냥 듣기만 했다.
--- p.39
남편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한 여자 대 한 여자로서 시어머니를 생각하며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페미니즘도 휴머니즘도 말해본 적 없는 분이시지만, 자기 인생의 어쩔 수 없는 인연으로 만난 또 한 여자를 당신의 방식으로 도와주셨다는 것이 뒤늦게 느껴져서…….
--- p.43
나를 위해 울어주어서는 아니다. 나여서 울어준 것도 아니다. 그의 눈물은, 약한 것들에 대한 공감에서 나오는 인간의 한 지극한 표현이라는 것을 나는 마음으로 읽었다.
--- p.70
각자의 존재가 그 자체로 인정받을 때 사람은 자신의 최대한을 실현하며 살 수 있다.
--- p.74
삶의 어떤 곡진한 순간에 있는 사람은 침묵으로라도 말을 한다. 다만 누구라도 들어주었으면 하는 그 간절한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일 뿐. 들으려고 한다면, 풀잎이 스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들으려고 한다면, 침묵도 들을 수 있다. 들으려고 한다면, 차마 말이 되지 못하는 울음도 들을 수 있다.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듣겠다는 뜻이 간절하면, 흘리는 한숨이라 해도 알아들을 수 있다.
--- p.106
그러나 때론 아주 조그마한 진실이라도 다 걸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 p.144
세상의 아흔아홉 사람이 슬퍼하는데, 나만 행복하거나 기쁠 수는 없다고, 나는 너무나 그렇게 선택받은 사람으로 살아왔다고……. 죄책감 없이 행복이나 충만 같은 단어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 p.181
대단한 일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타인의 고통에서 눈을 돌리려 하지 말아야 하고, 울음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있겠는지를 찾아봐야 하고,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 앞으로도 그 규범을 저버리고 살아갈 수는 없을 거야. 그건 분명 내 일부이니까.
--- p.184
나를 끌고 왔던 알 수 없는 힘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보이니, 이 여행의 종착점 가까이 왔다는 신호가 아닐까.
--- p.186
오늘 내가 타자에게 베푸는 환대는 미지의 어느 날 내가 혹은 내 후대가 이 세상 어딘가를 유랑하는 타자가 되었을 때 받기 원하는 대접에 다름 아니다.
--- p.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