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스 커서는 곧 시안을 출발해 빠르게 동쪽으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황하 유역을 지나 한반도에 이르렀고 이념의 장벽을 거침없이 넘어 현해탄을 건넜다. 특히 ‘광복 70주년’의 뜻깊은 해를 맞이하여 ‘화해와 배려’의 테마를 싣고 달리기로 했다. 지난 역사의 아픔은 ‘화해’로 풀고, 밝은 미래는 ‘배려’로 열어 나가자는 의미이다.」
프롤로그
「달리다가 타이어가 펑크 날 수도 있고,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지쳐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라서 들르고 싶은 곳, 식당, 잠을 잘 곳을 미리 예약할 수도 없다. 그게 자전거 여행이다. 달리다가 배고프면 식당을 찾고, 해 저물면 잘 곳을 찾아야 한다. 길을 잃으면 인연을 기다리고, 인연이 닿지 않으면 때에 이르지 못했음을 안다. 그게 바로 자전거 보헤미안이다.」
p.20
「시안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108번 국도에서 백팔번뇌를 생각한다. 인간의 괴로움은 ‘탐·진·치(貪瞋癡)’, 즉 욕심과 노여움, 어리석음이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고 괴로움을 낳는다 했다. 허나 그렇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까 인간은 늘 번뇌 속에서 괴로움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일 테지.
하지만 지나친 욕심, 분별없는 노여움, 게으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통해 조금이라도 번뇌의 늪에서 벗어나 고통을 삭이려고 수행하는 거겠지. 인생사 늘 좋은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게다. 즐거운 일과 힘든 일은 늘 함께하는 것이니까.」
p.89
「종종 이정표를 보면 이쪽으로 가도 되고, 저쪽으로 가도 되는 갈림길이 있다. 선택 사항이다. 그러나 언덕이 있는지, 노면 상태가 어떤지, 차량들이 많은지, 구경거리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 어느 길로 가야 할까? 그건 마음 내키는 대로 간다. 가다가 좋은 일이 생기면 ‘이 길로 오길 잘했다.’라고 생각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아마도 저쪽 길은 더 어려웠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p.204
「오후 1시. 비가 멈춰 식당을 나왔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또 쏟아지기 시작했다. 점차 빗줄기는 거세지고 아스팔트는 개울로 바뀌고 우리는 물속을 달렸다. 핸들 가까이 가슴을 대고 강한 바람의 저항을 줄여 보지만 좀처럼 속력이 나질 않는다.
“이 정도 비는 괜찮아.”
추니가 뒤에서 용기를 낸다. 광장 분수대를 들락거리는 애들처럼 즐겁다.」
p.215
「고베에 대해 아는 거라곤 기껏해야 20년 전 대지진으로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던 곳 정도다. 오사카에서 고베까지 차로 몇 시간이 걸리고, 몇 번 국도를 타야 하고, 인구가 몇 명이고, 볼거리는 뭐가 있는지 제대로 모르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여행은 미리 다 알고 가면 다소 밍밍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여행은 그야말로 예상치 않았던 상황과 부딪쳐 후회도 하고, 작은 기쁨에 놀라면서 풋풋한 여정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p.216
「오가는 차량도 사람도 좀처럼 볼 수 없고 계곡 아래 폐가로 보이는 집 한 채가 보였다. 부서진 밤송이가 널려 있는 도로변 음식점 간판에 토종닭과 도토리묵, 메밀부침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문 닫은 지는 오래된 것 같았다.
가마득히 양구가 내려다보이는 광치령 정상에 오르자 ‘청춘 양구에 오면 10년이 젊어진다’는 광고판이 번뜻하다. 계산대로라면 10년에 한 번씩만 와도 더 이상 늙지 않겠다. 양구 동면 대암산 기슭에 위치한 준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연치유센터’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p.275
「자전거 동북아 대장정 86일째. 우리는 DMZ 평화누리길을 따라 동에서 서로 횡단하고 있다. 오늘 마침 남북이 오랜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 이산가족 상봉을 하고 있다. 철조망 넘어 혈육 상봉 장면이 보이는 듯하다. 청춘을 다 보내고 이제야 마른 가죽 부비며 통곡한들 얼마나 한이 삭으랴. 그리도 연하던 이파리가 낙엽 되어 나뒹굴고, 우린 그 갈잎을 밟으며 횡단한다.
숲으로, 철조망으로, 지뢰로 가로막혀 남쪽에서 북쪽으로는 달릴 수가 없는 휴전선. 우리뿐만이 아니라 산양도, 고라니도, 멧돼지도 이산가족이 된 채 60년이 지났다. 권력일까, 이념일까, 신의 뜻일까.」
p.277
__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