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신사역에서 나와 반대편 언덕 쪽 허름한 빌라촌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프로듀서 방시혁 씨와 어렵사리 인터뷰가 성사된 것이다. 당시 그는 MBC 《위대한 탄생》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날카로운 독설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런데 비즈니스 현실은 녹록지 않았는지, 쉽사리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강남에서 가장 구석진 건물 한구석을 본거지로 삼아 연습생 트레이닝 공간이자 자신의 사무실로 활용하고 있었다. 아마도 JYP 엔터테인먼트에서 독립한 후 첫 작품인 걸 그룹(팀명: 글램) 멤버 선발과 트레이닝에 매진하던 시기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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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아시아학은 쉽게 말해 ‘일국주의一國主義 관점’을 극복해보자는 지역학의 한 방법론이다. 놀랄 만큼 새로운 방법은 아니지만 한국사회에 꼭 필요한 변화의 출발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엔 지역학이 국경선을 중심으로 중국학, 베트남학, 태국학, 한국학 등으로 나뉘었다면, 이제는 그런 국가체계 중심으로 쪼개서 보지 말고, 연결-비교-종합의 관점에서 지역을 바라보자는 얘기다.
--- p.28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케이팝은 이미 흥미로운 학문적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문화사회학, 인류학, 미디어학 학생들이 케이팝을 소재로 다양한 논문을 쓰고 있다. 2018년경 필자도 케이팝 관련 영어 논문을 전부 검색해서 찾아본 적이 있는데, 정말 다양한 나라, 다양한 학문 분야의 학생들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케이팝을 소재로 논문을 써내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특히 아시아를 주제로 삼은 연구자들에게 케이팝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의례와도 같다.
--- p.34
케이팝이 위대한 또 하나의 이유는 국적을 뛰어넘는 범아시아적 발상에 있다고 본다. 앞서 언급한 (여자)아이들이라는 걸 그룹은 한국인 3명, 태국인 1명, 중국인 1명, 대만인 1명으로 이루어졌다. 무척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조합인데, 이 젊은 외국인 친구들이 2~3년 만에 상당히 뛰어난 수준의 한국어를 완성해, 국내 활동은 100퍼센트 한국어로만 한다. 6명이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고 서로의 단점을 보완한다. 태국인 멤버 민니는 음악성이 뛰어난 음색장인이고, 중국인 멤버 우기는 털털한 예능감이 일품이고, 대만에서 온 슈화는 꽤나 돋보이는 청순미와 개그감으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방식이다.
--- p.58
싱가포르는 시스템이 잘 갖춰졌고 변호사와 회계사 인력 충원도 원활하지만, 증권시장이 턱없이 약하다. 미디어를 전공한 내 관점에서 싱가포르는 자본시장이 발달하기 힘든 사회다. 자본시장은 루머와 오보를 스스로 걸러내는 자정작용이 중요하다. 즉 뛰어난 미디어 시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싱가포르는 그것이 힘들 거라고 본다. 외국계 언론사 허용은커녕, 국내 미디어 활동도 자유롭게 놓아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 p.99
언젠가 나보다 10살쯤 어린 박사과정생 하나가 싱가포르에서 보낸 자신의 30년 인생을 이렇게 요약한 적이 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는 물론이고 당시 선생님들, 썸타던 친구, 사귀다 헤어진 연인, 대시하다 차인 이성, 나를 못살게 굴던 나쁜 놈들…… 과거와 현재에 만난 이 모든 사람 또는 미래에 만날 모든 사람이 우리 집 반경 1~5킬로미터 안에 있는 현실을 외국인인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으아, 그 이야기를 듣고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게다가 그 친구들과 선생님이 당신의 전국 석차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거의 미저리급이다. 물론 싱가포르 내에서도 이사를 갈 수 있다. 그런데 튀어봤자 벼룩이다.
--- p.105
1910년대에 양곤의 화교사회에서 탄생한 제품이 바로 ‘호랑이약Tiger Balm’이다. 호끼엔 출신의 양곤 거주 한의사가 개발해 1920년대 이후 세계적인 대히트를 기록했다. 이 호랑이약이 미얀마에서 개발된 이유가 있다. 바로 사계절 내내 창궐하는 모기와 벌레들 때문이다. 어떻게든 가려움증을 진정시키고 강력한 향으로 벌레를 쫓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효력이 있자 이 호랑이약은 동남아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팔려나갔고, 개발자인 호Aw 씨 일가를 동남아 최대의 부자 반열에 올려놓았다.
--- p.129
필자가 방콕이라는 도시를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방콕을 포함한 태국의 미래를 어둡게 보는 이유가 바로 수도 이전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조차 없을 만큼 꽉 막힌 태국의 정치지형 때문이다. 방콕은 이미 300년간 너무도 권력화되어 개혁 자체가 불가능한 공룡이 되어버렸다. 왕당파와 옐로셔츠가 방콕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태국은 더더욱 현재의 교착상태를 개선할 수 없다. 이른바 방콕의 딜레마다.
--- p.174~175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싱가포르에서는 담배와 관련된 수많은 경고를 듣게 된다.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우면 안 되고, 꽁초도 버리면 안 되고, 1갑 이상 밀수도 안 되고, 껌도 안 되고…… 벌금이 대충 60만 원 이상 나올 수 있다는 위협도 따라붙는다. 그런데 정작 싱가포르 사람들은 어디서나 자연스레 담배를 피우고, 꽁초도 아무렇게나 버린다. 외국인인 내가 놀라서 “야, 그래도 괜찮아?” 하고 걱정하면 황당한 답이 돌아오기 일쑤다. “응, 나는 괜찮은데 너는 괜찮을지 모르겠다. 흐흐흐, 난 시민권자잖아.”
--- p.179
35세에 요절한 호세 리살의 이상을 이어받은 사람이 보니파시오(1863~1897)라는 영웅적 투사와 아기날도(1869~1964)라는 귀족 집안 출신 독립투사였다. 1897년 보니파시오가 같은 독립군Katipunan 내 경쟁자인 아기날도에게 처형을 당하면서 필리핀의 역사는 귀족 중심으로 굳어진다. 혁명가를 출신계급으로 구분하는 건 어폐가 있지만, 그게 바로 필리핀의 현실이었다. 엇비슷하게 30세 전후였던 이 두 혁명가는 스페인과의 싸움 도중 노선투쟁을 벌이게 되고, 초대 지도자이자 하층민 출신인 보니파시오가 귀족 출신 아기날도에게 급작스레 밀리며 죽음으로 파국을 맞이했다. 생몰연대를 봐도 충격이지만, 이후 아기날도는 95세까지 장수하며 미국의 식민지 경영과 필리핀의 독립을 모두 목격한 뒤 평화롭게 영면했다.
--- p.236
한참 지난 얘기가 되었지만 김대중의 개혁개방 노선은 입에는 쓰지만 한국경제의 미래를 바꾼 ‘신의 한 수’가 되었고, 마하티르의 ‘아시아적 가치’와 ‘국가통제 자본주의’는 잠깐 반짝이다가 후배들에 의해 완벽하게 왜곡돼버린 비운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지도자는 본인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방향 설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함축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결과와 무관하게 마하티르를 아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시대적 한계를 맞닥뜨렸을 뿐, 본인의 비전과 실행력만큼은 창대하고 드높았기 때문이다.
--- p.257
1969년에 사망한 박순동 작가는 우리가 꼭 한번 재평가해볼 인물로 보인다.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서울 중동고를 수석 졸업한 그는 1940년대에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갔다가 강제 징집된다. 용산에서 6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944년 버마전선에 투입된 것이다. 임팔작전 도중 부대에서 이탈한 그는 인도군의 도움으로 영국군에 투항해 뉴델리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뒤, 거기서 미국의 OSS 대원들에게 포섭돼 태평양과 하와이를 오가며 조선반도 상륙작전을 준비한다. 《여명의 눈동자》에서 박상원이 분한 장하림이 바로 또 다른 그다. 최대치와 장하림은 결국 박순동을 쪼개어 인물화한 것이다. 그는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조선의 독립 소식을 들었는데, 그때의 비통함을 회고록 세밀하게 묘사했다.
--- p.323
회담이 끝난 직후 교도통신과 아사히신문 등 일본 유명 언론사 기자들과 맥주파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 기자들은 예상 외로 순박하고 솔직하고 술을 좋아한다. 필자도 평소에 궁금한 게 많아 여러 가지를 물었고, 그들은 매우 세련된 어법으로 답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한계는 뚜렷했다. 한반도 통일에 대한 일본 3040 지식인들의 의견은 종합 정리하면 ‘무기력함’이었다. 그들은 명확한 의견이 없었다. 비전도 없고, 모든 것을 아베 탓으로 돌리기만 하면 되는 눈치였다. 정부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넘어설 용기가 없어 보였다. 기껏해야 자국의 이해득실이나 따지고 있었다. 평화에 대한 비전이 부재했다. 바보 같은 녀석들, 그런 식으로 평생 한반도 분단의 콩고물만 주워먹다가는 결국 중국 대륙과 통일 한국에 밀려 2류 국가로 추락할 거라는 게 당시 술자리를 마친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 p.355~356
홍콩 문제를 단순히 중국 내부의 문제로 보는 건 아시아에 대한 인식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1930년대의 스페인 내전을 스페인만의 문제로 치부한 것처럼. 그렇게 유럽 각국이 자국의 영토 보존에만 집중한 결과가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그리고 나아가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것처럼,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의 야욕에 제동을 걸지 못하면 홍콩과 위구르에 대한 탄압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한반도와 남중국해에도 동일한 일이 반복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 p.380
2016년 촛불시위 당시 동남아시아와 중국은 굉장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았다. 기존의 틀로 해석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케이드라마나 케이팝에서 느껴지는 자유와 창의, 도전적인 모습에는 환호하지만,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확산되었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 ‘쫄지 마’ 자세를 살짝 자랑하고 싶다. 수많은 청춘과 보통 사람들이 권력 앞에 쫄지 않고 사회의 금기를 하나둘씩 깨부수며 전진하는 것이 한류의 참모습이 아닐까 하는.
--- p.391
필자는 감히 그 차이가 도덕적 완벽함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문화가 문명 수준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국경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지역적 윤리parochial ethics에서 벗어나 세계적 수준의 윤리적 감수성과 제도적 진보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케이팝이 연습생과의 노예계약을 일소함으로써 세계적 팝 시장의 대열로 도약했다는 필자의 주장은 상당한 역사적 근거에 뒷받침된 주장이기도 하다. 결국 인류의 역사는 노예제도를 극복하는 역사였고, 국가라는 위대한 제도와 더불어 강한 개인을 만들어내는 경쟁을 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 p.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