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주의 만물은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떨어져 따로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은 이 우주에 없다. 이것을 공이라고 한다.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서 공이 아니라 특별히 나라고 따로 말할 것이 없어서 공이라는 표현에 고개가 끄떡여졌다. '무엇이 나인가' 하는 질문의 답은 '나'를 생각한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 있고, 그 관계 속에서 내가 규정되는 것이었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앗다. 식구들, 친척들, 민우회원들, 명호언니, 윤희씨, 동네 사람들...... 그리고 내 주변의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화이트와 진진이, 고양이, 뒷산, 텃밭...... 이들 속에 내가 있고 이들과의 우정, 이들고 나누는 흐로 애락을 빼고는 나를 말할 수 없었다.
--- pp.256-257
오늘도 우리는 밥을 한다. 그리고 오가는 회원들을 불러 세운다. "밥먹구 가." 자기 집에서 인기 없어진 반찬들을 들고 온다. 공동체의 상에서는 그것들이 신선한 메뉴로 부활한다. 그 반찬 하나에 친정어머니 손맛의 내력이 나오고 그 반찬 하나에 시골집에 가게 된 사연이 나오고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서로의 인생에 얽혀들어 하나의 덤불을 이룬다. 거기에 꽃이 피고 새가 날아오고 바라는 것 없이 밥을 나누는 아줌마들 속에서 공동체가 재건된다. 돌아가 다시 만날 때까지 아파트로 나뉘어 살지언정 그들의 가슴에는 공동체가 살아 있다.
잘차린 손님상이 아니라 내가 먹는 매일의 밥상에 언제라도 숟갈 하나를 더 놓을 수 있는 여유를 되찾으면, 아이들이 너나없이 밥 사발을 같이 하면 여자들이 오가고 마침내 남자들이 열린다. 이웃이 열리고 세상이 열린다. 자기 밥은 자기 집에서 먹어야 한다고 믿는 아파트 아줌마들의 깍듯한 예의범절 속에 드디어 모내기가 시작된다. 벼가 익어간다. 상석도 없고 말석도 없는 누구라도 끼어앉을 수 있는 여유로운 밥상, 두레반을 펼쳐놓고 사람들을 부른다. "밥먹구 가." 사람과 정을 나누기 위해, 서로의 삶에 엉켜들기 위해 나는 오늘도 여자들을 부른다. "밥먹구 가! 제발."
--- pp.97~98
명절이나 잔칫날이 여자들에게 더 이상 즐겁지가 않은 것도 '대접하는 사람'과 '대접받는 사람'으로 갈라져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해결은 간단하다. 여자들은 상차리기에 분주하고 그 동안 남자들은 화투나 포커로 시간을 죽이는 '따로국밥'이 아니라 '비빔밥'을 메뉴로 정하면 명절이 저절로 웃을 것이다. 여자들끼리의 모임처럼 남녀가 모인 곳에서도 함께 차려서 한 상에 나눠 먹고 모두 나서서 치우고 같이 앉아 놀면 좋겠다. 서로간에 '치러내야 하는' 손님이 아니라 함께 하는 친구요, 가족이 될 것이고 사람들의 '모임'이 살아날 것이다. 예수가 그 열두 제자와 함께 했다는 최후의 만찬, 그 만찬은 과연 누가 차려냈을까.
--- p.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