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하였던가, 교교한 보름달이 땅을 비추던 그날 밤도 그러한 날 중의 하나였다.
궁궐의 보루각에서 종소리가 스물여덟 번 울리고 도성을 순시하는 순라군이 활동하는 늦은 밤중에, 날렵한 몸놀림으로 까마득한 포도청의 높은 담을 넘는 이가 있었다. 새까만 무복과 등에 멘 검, 하나로 묶은 긴 머리에 눈 밑을 가린 복면까지 수상하지 않은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는 그녀는 근처 건물의 처마 밑에 생긴 달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평소와 달리 지키는 이가 소수뿐인 좌포도청은 그녀에게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야음을 틈타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주인 없는 포도대장의 방에 숨어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서랍 하나하나 샅샅이 뒤져 보아도 찾고 있던 은자는 나오지 않았다.
정보통에 따르면 포도대장이 뇌물로 받은 은자를 이곳에 모아두었다고 했으나 옷장까지 뒤적여도 은자는커녕 비녀 하나 나오는 게 없었고, 장물로 팔 만한 건 덩어리가 커서 운반하기조차 어려웠다.
‘이를 어쩐다…….’
의금부와 좌포도청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의적을 잡겠다고 자리를 비운 지금이 탈탈 털어줄 적기건만, 이렇게 시간만 속절없이 보내게 되니 그녀는 점점 조급해졌다. 그러다 마침내 한쪽 벽면을 차지한 여덟 폭짜리 병풍으로 시선이 갔다. 방을 전부 뒤져도 은자가 나오지 않고 있으니, 남은 건 비밀 장소뿐이었다. 그런 공간은 대체로 병풍 뒤에 있기 마련이었다.
목표물이 정해지자 행동은 신속했다. 가장자리로 다가가서 끝을 좌르륵 밀자 병풍이 몸집을 줄이며 접혔다. 그 순간 드러난 모습에 그녀는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급히 손으로 틀어막았다.
병풍 뒤의 공간에 사람이 서 있었다. 두 눈을 빤히 뜨고 쳐다보고 있는 사내도 그리 떳떳하진 않은지 검은 천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상태였다. 그런데도 검은 도포에 갓을 써서 양반임을 한껏 드러낸 그는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낮은 음성을 천천히 내뱉었다.
“이런 식으로 발각당할 줄은 몰랐는데.”
몰랐다는 말과 달리 그의 말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고, 날카로운 눈빛은 당장에라도 베일 듯 매서웠다. 소름이 돋을 만큼 옥죄는 기운에 위험을 감지한 가혜는 급히 등에 멘 검을 뽑으며 뒤로 물러섰다. 심장은 여전히 불뚝불뚝 뛰고 터지지 못한 비명이 목구멍을 맴돌았으나, 그녀는 입을 다물고 두려움을 참아냈다. 겁에 질려 벌벌 떨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그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소모하는 편이 더 나았다.
‘비단옷에 갓을 쓴 걸 보면 좀도둑은 아니고, 기세만 보아도 실력이 만만찮은 자야. 날 잡으려고 매복 중이었던 건가?’
포도대장이 심어놓은 인물인가 싶었지만, 그녀는 곧 그런 생각을 접었다. 떳떳하다면 얼굴을 가릴 이유가 없고 두 손에 무기조차 들지 않은 상태일 리도 없었다. 차라리 양반집 자제가 포도대장의 방에서 무언가를 훔치고자 숨어들었다는 게 더 그럴싸했다.
경계하며 유심히 살피는 가혜와 마찬가지로, 인후도 그녀를 신기해했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에 등에 멘 검과 조선에서는 쓰지 않는 손가락 모양의 장갑, 검은색 일색인 옷에 여인처럼 얇은 몸. 그것만 보아도 백성은 칭송하고 양반은 이를 간다는 의적, 양묘가 분명했다.
상대방의 정체를 안 인후는 헛웃음을 흘렸다.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좀 전에 포도대장이 양묘를 잡겠다고 포졸들을 이끌고 나갔는데, 정작 그의 방에 추포하려는 대상이 와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빈집털이를 하겠다, 이거로군.”
그건 본인도 피차 마찬가지였지만, 어린놈이 확실히 보통 배짱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가지, 껄끄럽게 걸리는 것이 있었다.
‘저 몸이 정녕 사내인가?’
벗겨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궁금했다. 과연 소문대로 상투를 틀지 않은 어린 사내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눈썹을 다듬은 모양새가 너무 계집 같았다.
의구심이 든 그는 가혜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뒷짐을 지고 거리를 좁히는 그의 당당함에 기세 싸움에서 밀린 가혜는 뒤로 더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차분히 상대의 빈틈을 찾았고, 그런 태도에 그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확실히 제법이라는 감정이 다분한 탄성에, 검을 쥔 가혜의 손끝에는 힘이 들어갔다. 상대는 무기도 없는데 그녀는 불안감을 느꼈다. 어쩌면 오늘 그의 손에 복면이 벗겨지거나 포박당하거나 혹은 죽을지도 몰랐다. 그때, 유일하게 드러나 있던 가혜의 눈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까맣던 창호지가 점점 누런빛을 발하고 있었다. 동이 틀 무렵도 아닌데 밖이 훤하다는 것. 그 현상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함정!’
덫에 걸렸다. 부러 좌포도청을 비우고 은자를 숨겨두었다는 소문을 흘려 사냥감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게 한 것이다. 꼼짝없이 죽을 상황에 암담함을 느끼기도 전에, 근엄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죄인, 양묘는 나와서 오라를 받아라!”
의금부의 수장이자 조선의 병권을 쥔 병조판서, 최권식의 음성이 분명했다. 현종이 가장 아끼는 신료이자 대쪽 같은 성격으로 금부를 이끌어가는 그는 머리마저 비상해서 좌우 포도청이 지난 이 년간 번번이 놓친 양묘를, 사건을 이관받은 지 단 두 달 만에 좌포도청 한가운데서 포위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 사실을 각인시키는 목소리에 가혜는 굳어버렸고, 인후의 얼굴에는 낭패감이 스쳤다. 뭐 이런 일이 다 있는지. 금부의 계획을 확실하게 알아두지 못한 게 문제였다. 자신이 의금부 사람이면서.
“하아.”
한숨이 팍팍 나왔지만 일은 벌어진 뒤였다. 피할 곳은 없었고, 문은 물론 뒤쪽 창문까지 심히 밝은 것으로 보아 이미 완벽하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의금부에 포도청까지 합세했으니 군졸의 수는 못해도 백 명 이상이었고, 이대로 잡히면 말 그대로 사형이었다.
어떻게든 뚫고 지나가야 할 상황에 인후는 복면을 더 단단히 묶으며 가혜에게 말을 걸었다.
“다섯 놈만 맡아라.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지.”
‘뭐?’
가혜는 소리 내어 묻지도 못하고 벽에 걸어둔 검을 빼 드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돋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함께할 것인지 묻는 눈빛에 자연히 고개가 끄덕여졌다. 돌파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잠시나마 함께하기로 의기투합하자마자 그의 발이 창문을 박찼다. 횃불 덕에 한층 밝아진 마당에는 무장한 나졸들이 가득했지만, 그는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그 모습이 가혜의 눈에는 참으로 든든하게 보였다.
반항하는 죄인들과 체포하려는 나졸들의 대치로 좌포도청의 앞마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앞을 막는 군졸의 수는 절대 적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차분하게 하나씩 쓰러뜨려 나갔다. 오른손에 든 검으로 나졸들의 공격을 막고, 왼손에 든 검집으론 상대의 뼈를 부러뜨렸다. 혹여나 죽는 이들이 없도록 애쓰는 만큼 뚫고 나가긴 힘겨웠고, 그만큼 가혜도 죽을 맛이었다. 숫자를 모르는 어린아이가 보아도 그녀가 쓰러뜨린 수는 절대 다섯 명이 아니었다. 자신감에 차서 인원까지 지정해 주며 맡으라던 그의 모습이 그녀의 뇌리에 악몽처럼 남았다.
‘스물은 족히 넘었다, 이 인간아!’
평소엔 쓰지도 않는 저속한 말투가 머릿속을 헤집어댈 만큼 그녀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힘겨워 입술을 악물지 않았더라면 양묘는 말을 못 한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분전 중이라 적들이 활을 쓰지 못한다는 것 정도였다.
오늘은 재수가 옴 붙은 게 분명했다. 살아서 나간다면 꼭 대문 앞에 소금을 뿌리리라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부지런히 검을 놀렸다. 화려함을 버린 대신 실리를 챙긴 검술이 그 자리에서 꽃을 피웠고 덕분에 아직까진 목을 사수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열심히 검을 휘두를 때 좌포도청의 대문 위, 누각에는 붉고 노란 구군복을 갖춰 입은 최권식이 있었다. 중년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커다란 체구에 부리부리한 눈은 적군의 공포심을 자극했고, 화려하게 꾸며놓은 지휘봉인 등채를 들고 싸움판을 내려다보는 모습은 가히 전선을 호령할 만한 장군 같았다.
그는 나졸들을 쓰러뜨리는 두 사람을 지그시 응시했다. 성격대로라면 이미 화를 내고도 남았을 터인데, 그의 눈은 점점 더 가늘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이상하군.’
확실히 이상했다. 양묘는 그렇다 쳐도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사내는 권식의 마음속에 의문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양반들이나 입는 도포와 갓도 그렇지만 지닌 실력이 보통이 아닌 데다가 체격까지 낯익었다.
‘저런 괴물 같은 놈은 흔치 않은데…….’
무과가 열릴 때마다 항상 참관해 왔던 그였으므로 웬만한 무인들의 실력은 다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아는 한, 눈앞의 사내와 비슷한 실력을 지닌 젊은이는 조선에 딱 한 명뿐이었다.
‘설마 현욱이는 아니겠지?’
아들의 친우를 떠올린 그는 곁에 있던 금부도사에게 명을 내렸다.
“당장 대사헌 댁으로 가서 김현욱 종사관을 불러오게.”
“예!”
명을 받은 도사는 곧바로 몸을 돌려 포도청을 빠져나갔다. 혹시나 싶은 생각에 조치를 취한 권식은 현욱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었다. 지금은 눈앞에 튄 불똥을 처리하는 게 더 시급했다. 두 죄인이 중문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놓칠 게 빤했기 때문이었다.
“뭣들 하는 게야! 창은 뒀다 죽 쒀 먹나!”
그의 고함을 들은 나졸들이 창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그마저도 아군을 찌를까 저어한 탓에 큰 효과를 발휘하진 못했다. 지금으로선 인해전술밖에 기댈 데가 없는 권식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군사가 많으면 뚫고 나갈 엄두조차 못 내고 투항하리라 생각한 것이 도리어 발목을 잡았다. 적과 근거리에 있는 아군은 외려 방해가 되었고, 예상치 못한 놈팡이 하나가 끼면서 다 된 밥에 재까지 뿌리니 열이 뻗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망할 것들을 봤나.”
권식은 욕설을 뱉으며 뒤에 서 있던 나졸에게서 활과 화살을 뺏어 들었다. 팽팽하게 당긴 시위에 화살을 메기고 도망치려는 두 죄인에게 겨눈 그는 날뛰는 감정을 가다듬었다.
‘놓칠 바엔 죽여서 시신이라도 챙겨야 내 면이 서지.’
즉결 처분을 결심한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중문을 나오는 즉시 심장을 뚫어버릴 생각이었다.
권식이 활을 겨눈 걸 발견하지 못한 채 끝없이 검을 휘두르던 가혜는 점점 가빠지는 호흡을 느꼈다. 죄 없는 나졸들을 죽이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신경 쓸 게 훨씬 많았고, 체력은 곧 바닥을 드러냈다. 민첩하던 움직임도 둔해진 상황에서 그나마 버티고 있는 건 길을 뚫고 있는 사내 덕분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집이 화려한 호선을 그리면 주위에 있는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후두둑 쓰러지곤 했다.
‘운이 좋았던 건가.’
가혜는 좀 전까지만 해도 원망하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포승줄에 묶여 의금부 마당에 섰을 터였다. 그러나 그 실력에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는 게 먼저였기에 집중하자고 스스로 되뇌는 중에 중문 계단에 발이 닿았다.
‘이제 대문까지 열 보. 조금만 더.’
희망에 찬 그녀의 입술이 복면 아래서 슬며시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줄기차게 듣던, 검을 휘두르는 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옆구리가 후끈해지고,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증에 가혜의 손이 무뎌졌다. 그 찰나가 그녀의 운명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집중할 때면 움직이는 물체가 느려 보이는 인후는 자신의 너풀너풀한 소매를 뚫고 지나가는 화살을 발견했다. 잘 피했다고 생각했으나, 오산이었음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화살을 따라 몸을 돌린 그는 양묘의 허리띠가 찢기면서 핏방울이 튀는 걸 보았다. 그와 동시에 그가 감당해야 하는 군졸의 수가 증폭했다.
‘이런 난장맞을 일이 있나!’
인후는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멀쩡히 살아서 나가야만 했다.
멀리서 관군들이 외치는 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깼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소란스러운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저쪽이다!”
“잡아라! 양묘가 도망친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질러대는 고함에 백성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으며 양묘가 무사히 도망치길 빌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부정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다쳤으니 멀리 못 갔을 것이다! 샅샅이 수색해라!”
땅에 올라온 물고기를 놓친 것이 제법 억울했는지 호령하는 동지사의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 들어 있었다. 추상같은 명령에 군졸들이 주위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고, 양묘가 빠져나갈 길은 요원해 보였다. 그렇게 점점 포위망을 좁혀가는 중에, 어느 초가집의 담장 안쪽에선 곤란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키보다 더 높은 장작더미 사이에 숨은 가혜는 거의 껴안듯이 바짝 붙어 있는 사내 때문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호흡만 잘못해도 몸이 닿을 듯 가까웠다.
‘차라리 다른 곳으로 갈걸.’
경황없는 새에 그의 손에 이끌려 이곳까지 흘러들어 왔는데, 문제는 그녀의 예민한 감각이 그의 존재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위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와 뜨거워진 그의 체온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내와 이리 다붓한 자세를 취하는 건 꽤나 곤혹스러운 탓에 그녀는 부디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빌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녀의 본능을 시험이라도 하려는 건지 더 가혹하게 굴었다. 군졸들의 소란스러움에 집 안에 있던 이가 불을 켠 것이다.
머리맡 쪽에 달린 창문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와 그의 목선을 비추자 침을 삼킬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땀에 젖은 목울대가 보였다. 사내의 굵직한 목선을 이리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것도 처음인 그녀는 좀 전에, 검술을 펼치던 그의 화려한 움직임을 떠올렸다. 능수능란하게 검을 다루는 솜씨와 손을 잡고 이끌던 든든한 모습도 뇌리를 잠식하니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기분이 이상해졌다.
결국, 두 볼마저 발갛게 달아오른 가혜는 그 감정을 피하고자 시선을 좀 더 내렸으나, 목을 벗어나니 이번엔 기대고 싶을 만큼 듬직한 어깨가 시야에 들어왔다. 제 몸을 가뿐하게 품어줄 만한 체격에 유달리 시원하게 느껴지는 그의 체취마저 심장을 들쑤셔 대니, 그녀의 이성이 조금만 부족했더라면 그냥 확 안겨 버렸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내가 왜 이러지.’
그에게 자꾸 눈길이 가는 걸 자책한 그녀는 최대한 신경을 분산하려 했다. 마침 적당한 관심거리도 있었다. 손으로 눌러 지혈 중인 허리의 상처였다. 화살이 날아올 때 몸을 조금만 덜 비틀었다면 그대로 관통하여 크게 났을 상처는 거구의 병조판서를 떠올리게 했다.
그 정도 거리에서 그렇게 정확히 쏠 줄은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횃불이 주위를 밝혔다고는 하나 낮에 비하면 훨씬 어두웠고, 적과 아군이 뒤섞인 상황에서 거리 또한 멀었다. 그 와중에 화살을 쐈다는 건 누가 맞든 상관없었거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소문으론 그가 부하들을 꽤 아낀다 하였으니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컸고, 가혜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날 일이 없길 바랐다. 그와 또 마주친다면 그땐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가혜가 권식에게 공포심을 느끼고 있을 때, 인후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턱 부근에 정수리가 닿는 것이 여인 중에서는 키가 큰 편에 속하고, 가녀린 어깨와 다듬어놓은 눈썹은 사내라 하기엔 너무 고왔다.
성별이 헷갈리는 만큼 면밀히 살피던 그는 가혜가 지혈 중인 상처를 발견하곤 자신의 도포 자락을 길게 찢어냈다. 그걸로 상처를 감아주던 인후는 손에 닿는 허리의 곡선과 긴장하여 굳어버린 그녀의 몸을 느꼈다. 사내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굴곡이었다. 비로소 그는 포도대장이 지난 몇 년간 양묘를 놓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성별부터 착각했으니, 놓칠 만도 하지.’
상투를 틀지 않은 어린 사내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벌인 터라 처음부터 진범이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여인의 무력을 우습게 본 탓이 컸다. 물론 그녀가 그런 심리를 알고 이용했을 수도 있었다. 머리를 풀어 올리고 목소리를 감춘 것도 성별을 착각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건 정말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주위를 수색 중이던 동지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근처에서 혈흔이 끊겼다! 집 안까지 전부 뒤져서 확인해라! 죄인을 숨겨주는 이가 있다면 의금부로 압송할 것이다!”
그 말은 인후의 진지한 눈빛에 빠져 있던 가혜에게 이성을 되찾아주었다. 이대로 있다간 발각될 테고 다시 포위당하면 그땐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이름 모를 사내도 이미 한계치에 도달한 상태였다. 처음과는 확연히 달라진 그의 호흡과 땀 맺힌 이마만 봐도 체력이 바닥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다치기까지 했으니 한 번 더 기적을 바라는 건 무리였고, 벼랑 끝에 몰린 그녀는 서로 반대편으로 도망가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다친 본인에겐 최악의 결정이었으나 그만큼 군졸을 분산시킬 수 있었고, 저는 몰라도 눈앞의 사내만큼은 살아서 빠져나갈 수도 있을 터였다.
위험을 감내하기로 결단을 내린 가혜가 입을 열었을 때, 그가 선수를 쳤다.
“유인할 테니 조용해지면 도망가시오.”
그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서둘러 몸을 돌렸고, 놀란 가혜가 다급히 손을 뻗었으나 그의 도포 자락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담을 넘은 그가 부러 모습을 드러내자 군졸들의 고함이 연이어 들려왔다.
“저기다! 죄인이 저기 있다!”
“잡아라!”
요란하게 쫓아가는 소리가 가혜의 심장을 짓밟고, 찾아드는 고요함이 되레 마음을 어지럽혔다. 손가락 끝을 빠져나가던 그의 옷자락과 잔잔히 스며들던 목소리만 되짚던 그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피했다.
양묘의 흔적을 찾는 이들로 여전히 소란한 밤길을 뚫고 남쪽으로 향한 그녀는 기와지붕보다 초가지붕이 더 많은 남산골에 들어선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핀 후 불 꺼진 어느 초가집의 울타리를 넘었는데, 그곳이 그녀의 보금자리였다.
삐걱대는 마루 위로 올라선 가혜는 부친이 자고 있을 사랑방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머무는 방의 내부는 매우 조촐했다. 우측 벽에는 많은 양의 책을 올려둔 낮은 서랍장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좌측에는 옷장과 창문이 하나씩 있었다. 창은 크기가 작았지만, 그래도 달빛이 제법 들어와서 가혜는 그 빛에 기대어 등에 멘 검을 풀고 장갑을 벗은 뒤 복면을 내렸다.
양묘의 기백은 살그머니 물러나고 온전히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여인 중의 여인이라 할 만했다. 유백색의 미려한 살결 위의 상기된 두 뺨은 분홍빛 꽃잎으로 물들인 듯하고, 잘 다듬어진 눈썹 밑에 자리한 눈동자는 맑고 고아하니 보는 이마다 귀히 여길 만했다. 굳게 다물어진 아려한 입술은 그녀의 성향을 보여주었고, 땀에 젖은 얼굴은 묘하게 색념을 품게 하니 그야말로 천의 얼굴이라 할 만했다.
고되던 하루를 떠올리며 옅은 숨을 흘린 가혜는 의문의 사내가 허리춤에 묶어준 도포 자락을 풀고 저고리를 벗었다. 핏물에 붉게 물든 흰 속저고리마저 바닥으로 내려앉고, 가슴을 짓누르던 넓적한 천을 풀자 탱글탱글하니 적당히 탐스러운 것이 그 봉긋한 자태를 드러냈다. 몸을 속박하던 가슴가리개를 벗은 덕에 숨쉬기가 좀 편안해진 가혜는 그제야 허리의 상처를 살폈다. 육안으로 보니 베인 부분이 그리 깊지 않아서 잘만 관리하면 상흔도 없앨 수 있을 듯했다. 지혈이 완벽히 된 걸 확인한 가혜는 저를 대신해 위험을 무릅쓴 사내를 떠올렸다.
‘무사히 몸을 피했을까.’
그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이후의 사정을 모르는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지만, 그런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인후는 추격을 피해 멀쩡한 모습으로 한양의 밤길을 거침없이 움직였다.
한참 쏘다니던 그의 발길이 멈춘 곳은 잠겨 있는 물레방앗간 앞이었다. 작은 물줄기에 방아 찧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리는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 딸린 작은 방이 보였고, 그 안으로 들어선 인후는 등잔에 불을 붙이고 복면을 벗었다.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에 사람을 홀리는 눈매, 쭉 뻗은 눈썹과 순간적으로 풍기는 느낌이 매우 싸한 얼굴이 드러나고 곧이어 조금 부드러운 기운이 그의 눈빛에 섞여들었다.
외양만 보면 조선 최고라는 말이 붙을 만한 그는 벽에 걸린 옥색 도포로 갈아입고 근처에 있던 술병을 집어 들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좀 마셔야만 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그 즉시 세상과 하직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술이 될지도…….’
쌉싸래한 액체를 한 모금 더 넘긴 인후는 떫은 입맛을 다셨다. 집에 들어앉아 벼르고 있을 존재 때문에 목숨이 간당간당한 것도 문제지만, 해가 뜨면 의금부로 등청해야 하는데 양묘의 도주까지 도와버렸으니 마음마저 산란했다. 거기다 더해 아끼는 부하들을 본의 아니게 검집으로 두들겼던 그는 스스로 한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참으로 난감한 밤이었다.
갈색 패랭이를 쓴 삼십대 초반의 사내는 양묘를 쫓던 이들이 사라진, 한산한 새벽녘의 거리를 바삐 걸었다. 그는 얼굴만 보아도 참 사연이 많아 보였는데,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에 도드라지는 광대뼈, 큼지막한 입은 어딘지 해학적이면서도 정감 가는 얼굴이었다.
“나란 놈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종놈으로 태어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주인이란 나리는 말썽만 부리고. 아이고, 내 팔자야.”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투덜거리던 그는 사라진 제 주인을 떠올리며 한숨을 흘렸다. 하는 짓은 좀 그래도 생긴 건 돋보이니 눈에 띌 만도 한데 어째선지 보이지가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몇 채의 집을 더 지난 뒤에야 그는 남의 집 담벼락에 기대어 잠든 양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커다란 체구에 옥색 도포를 입고 손에 술병까지 쥔 것이 뉘 집 자식인지 안 봐도 뻔했다. 의식 없는 그의 앞에 멈춰 선 달수는 코를 막고 미간을 팍 찌푸렸다. 술에 몸을 절였다고 해도 믿을 만큼 알싸한 냄새가 코를 따갑게 만들었다.
“여봐요, 나리. 나리?”
달수는 죽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발을 쭉 뻗어 그의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가끔 자신을 기생으로 착각하고 달려드는 인후 때문에 생긴 대처법이었다. 이 와중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을 뜬 주인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올려다보았다.
“이야- 이게 누구냐, 응? 누구기는! 우리 달쑤지!”
술에 취해 방방 뜨는 말투로 혼자 북도 치고 장구도 치는 인후를 보면서 달수는 혀를 쯧쯧 찼다. 어찌 된 양반네가 체통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럼 달수지 박수겠어요? 지금 나리가 여서 이러고 있을 땝니까, 예? 내가 나리 때문에 간땡이가 쪼그라져서 똥구멍으로 나오게 생겼어요!”
신분 차가 확실한 조선에서 양반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으나, 달수는 아랑곳 않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런 그가 익숙한지 인후는 그저 실실거리며 엉덩이 한쪽을 비스듬히 들고 손을 가져다 댔다.
“이렇게? 똥으로? 뿌띡?”
그는 진짜 똥이라도 싼 것처럼 손가락을 동글게 말고 달수에게 내밀었다. 그 모양새를 실시간으로 본 달수는 기가 차서 말도 못 하다가 열통을 터뜨렸다.
“어이구! 이런! 내 눈 썩네, 썩어!”
이런 화상이 또 있을까 싶은 눈으로 쳐다보아도 인후는 바보처럼 히죽이며 웃어대기만 할 뿐이었다. 그 꼴을 보던 달수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취객을 상대하는 건 정신 건강에 썩 좋지 않았다. 체념한 그는 주인 나리의 팔을 잡아서 어깨에 걸치고 낑낑대며 그를 일으켰다.
궂은일로 단련된 달수의 몸이 휘청거릴 만큼 커다란 인후의 육신은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그 와중에도 술병을 놓지 않는 애주가의 집착에 달수는 습관적으로 혀를 찼다. 정말 이놈의 나리 때문에 제명에 못 죽을 것만 같았다.
“대감마님이 얼마나 벼르고 계시는지는 아셔요? 이대로 들어가면 나리 송장 치를 판이어요.”
“어허, 이누마! 내가 오대 독자니라.”
“사대겠지요.”
달수는 낑낑대며 걷는 와중에도 인후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걱정거리가 들어찼다. 정말 이 상태로 귀가했다간 제 나리는 뼈까지 가루가 될지도 몰랐다. 술만 취하면 수십 번씩 변하는 인후의 말투 중에서 최 대감이 가장 싫어하는 게, 좀 전처럼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어리보기 짓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 대감마님께 그러면 진짜 죽을 텐데. 다른 데 숨겨뒀다가 술이 좀 깨면 데려갈까?’
말은 퉁퉁거려도 속으로는 인후 걱정에 달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는 오늘따라 극에 달해 있던 최 대감의 분노를 떠올리곤 곧 결단을 내렸다.
“안 되겠습니다, 나리. 술 좀 깨고 갑시다.”
달수는 방향을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성질 급한 최 대감이 풀어둔 노비들에 의해 두 사람은 금세 발각당해 버렸다.
사랑채 앞에 놓인 거대한 화롯불이 마당을 훤히 밝히고, 구군복도 갈아입지 못한 권식은 마른 땅 위를 이리저리 배회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근처에 서 있는 현욱에게 닿았다. 늦은 밤에 급히 불려 나왔음에도 구군복을 갖춰 입고 반듯하게 서 있는 모습이 흠잡을 데가 없었다. 왜소한 대사헌의 아들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보기 좋은 체구에 감탄스럽게 생긴 얼굴도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항상 흐트러짐이 없는 날카로운 시선이야말로 권식이 애정해 마지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저 아이 반만이라도 닮으면 좋으련만.’
말썽 많은 자신의 외아들을 떠올리다가 속만 뒤집힌 권식은 몇 시각 전에 놓쳐 버린 죄인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현욱이가 아까의 그 괴한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금부도사가 대사헌 댁에 갔을 때 현욱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고, 시간상 그 괴한과 동일인으로 추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자란 뜻인데, 권식이 알기로는 조선에 일당백의 능력을 지닌 젊은이는 현욱 외엔 없었다. 물론 제 아들도 한때는 그런 인재였으나, 사냥 중에 낙마하면서 머리를 다친 뒤부터는 그런 기대가 쏙 들어갔다.
“에휴.”
화가 좀 가라앉자 한숨이 터졌다. 손자의 재롱이나 보고 여생을 즐겨야 할 나이에 골치 아픈 아들놈 때문에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깊은숨을 내뱉었을 때, 대문과 이어진 행랑채 쪽에서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오너라, 소향아! 이 나리가 오셨느니라.”
조선 최고의 기생이라는 소향이를 불러대는 목소리 뒤엔 노비들의 아우성이 따라붙었다. 그 소란에 권식은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아가며 중문을 향해 거친 걸음을 옮겼다. 반쯤 닫힌 나무 문을 벌컥 열자마자 노비들을 껴안아대는 아들의 뒷모습이 보이고, 집인지 기방인지, 기생인지 노비인지 구별 못 하는 그의 행태에 참지 못한 분노가 권식의 목젖을 건드리며 터져 나왔다.
“최인후!”
아버지의 노호에 비척비척 몸을 돌리는 그는 열일곱에 장원 급제한 인재였다가 지금은 한양 최고의 한량이 되었다는 권식의 하나뿐인 아들, 바로 최인후였다.
놀란 노비들이 얼른 뒤로 물러서고, 술에 취해 홀로 서 있기 힘든 인후는 술병을 들고 휘청휘청했다. 그 모습이 마치 뭍으로 나오는 귀신을 떠올리게 하는지라 식겁한 달수는 인후가 권식 앞에 꿇어앉도록 도와주었다. 다 큰 자식 놈이 제 몸 하나 못 가누는 꼴을 보던 권식은 아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화병이 돋아 미칠 지경이었다.
“내 분명 네게 당직청에서 대기하라 명을 내렸거늘, 또 술이란 말이냐!”
고막을 찢는 소리에 술에 절어 있던 인후마저 움찔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인사불성이던 그는 본능적으로 사태를 파악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 다소곳한 자태에도 권식의 호통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비 얼굴에 먹칠해도 유분수지, 포도대장이 뭐라 생각했겠느냐! 이 밤에 도둑놈 하나 잡겠다고 뛰어다니는 걸 알면서 네놈은 술 처먹으며 기생 치마폭이나 파고들어? 그 대갈통에는 생각이란 게 있는 게냐, 없는 게냐!”
삿대질까지 하며 버럭버럭 화를 내던 권식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이 날아갈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느라 씩씩대는 그의 숨소리가 마당을 휘어잡고, 눈이 뒤집히기 직전인 그가 괜찮아질 때까지 모두 숨을 죽였다. 그가 이성을 잃으면 말릴 수 있는 이는 적어도 이 집 안엔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저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는데 불난 집에 기름통을 던지는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술에 취하여 위험에 대한 감각마저 무뎌진 그의 아들이었다.
“에이, 아버지도 참. 소자도 열씸히 일했습니닷.”
여전히 혀가 반쯤 꼬부라져 있는 인후는 나름 항변이란 걸 했다. 기겁한 달수가 그 입 좀 다물라는 뜻으로 계속 눈치를 주었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사대 독자의 씨를 이이-마안크음 뿌렸습죠.”
말끔하게 생긴 얼굴로 두 손을 쭉 뻗어 큼직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그는 뿌듯함을 담아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를 이으려 노력했으니 잘했따아- 하셔야지요.”
차라리 죽여달라고 했으면 더 나았을 것을, 권식의 주먹이 바르르 떨리고, 친우의 술주정을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현욱은 눈을 감아버렸다. 주위에 서 있던 권속들은 어깨를 움츠린 채 고개를 숙였다. 모두 인후가 반쯤 죽어 나가리라 생각했으나 뜻밖에도 권식은 이 상황을 잘 참아냈다.
“그래, 최씨 가문의 혈통을 잇는 것도 중한 일이지.”
“예?”
발길질이라도 날아올 줄 알았던 인후는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태도에 도리어 당황했다. 그는 술에 취한 척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부친을 올려다보았다. 더 짙어진 새벽녘의 어둠 속에서 횃불에 비친 아버지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것은 소름이 끼칠 만큼 묘한 종류의 미소였다.
“기왕 뿌리는 거 제대로 한번 뿌려보자. 천기의 몸에서 내 핏줄이 이어지는 꼴은 눈 뜨고 못 보니, 내 참한 규수 한번 알아보마.”
“…….”
인후는 제 입이 벌어지는 것도 모르고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혼인이라니, 밤에 움직이는 그에게 그것만큼 귀찮고 문제 되는 존재를 만드는 방법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망나니라는 소문이 파다한 덕에 한양 땅에선 시집올 규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 믿고 그는 마음을 놓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