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송강(松江) 정 철(鄭澈)의 《장진주사(將進酒辭)》의 한 구절이다.
옛부터 술은 예술과 많은 관련을 맺어 왔다. 예술가 치고 술을 좋아하지 않은 이가 없고, 위대한 예술 속에 술에 관한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나온다. 이만큼 술은 인간과 가까운 기호식품이라고 할 수 있다. 술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민족이건 원시 때부터 있어온 음료이다. 그리고 신화나 전설에 으레 술이 등장하고 있는 사실로 보아 사람이 술을 마시게 된 것은 아주오래 전의 일이라거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의 문헌에 따로 이 술의 기원을 전하는 기록은 없다. 다만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의 탄생에 얽힌 설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海慕漱)가 하백의 딸 유화(柳花)와 인연을 맺기 위하여 미리 술을 먹여 취하게 하였다는 기록이다. 이렇게 해서 주몽이 태어났다. 이 고구려 건국신화의 한 토막은 우리 나라에도 술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삼국지』<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은 노래와 함께 춤을 추면서 하늘에 제사 드리는 행사였는데, 이때 술을 마셨으리라 짐작된다. 이처럼 술은 아득한 옛적부터 있었던 것인 만큼 그 제조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천이 있었다. 원시시대에는 구하기 쉽고, 또 자연상태에서 발효되었던 과실주를 많이 마셨을 것이고, 유목시대에는 가축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유주(乳酒)가 많았을 것이다. 또 농경시대에 들어와서는 곡식을 양조시켜 만드는 술이 생겼다.
중국의 고서『전국책(戰國策)』에 보면, 기원 전2세기에 중국에 술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 황제(黃帝)의 딸 의적(儀狄)이 술을 빚어 우왕(禹王)에게 올렸더니, 우왕이 이를 맛보고는 “후세에 반드시 이 술로 말미삼아 나라를 망치는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술을 끊고 의적을 멀리하였다고 한다.
--- pp.83~84
맷돌은 곡식을 가루로 만드는 농기구 중의 하나이지만, 반드시 농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맷돌은 한짝만으로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두 개의 돌이 빙빙 돌아가며 마찰을 할 때 딱딱한 곡물은 마침내 부드러운 가루가 된다. 따라서 맷돌으 곰보처럼 얽은 돌 두 짝이 한 조가 된다. 재질은 대부분 거칠게 쪼은 화강암니나.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화산석으로 만들어지는 게 제격이다. 맷돌에 대한 소개책자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서호수가 지은 『해동농서(海東農書)』이다. 여기에 의하면 맷돌[石磨]과 매통[木磨], 연자매[連磨]등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나무로 만든 매통이나, 소나 나귀 등 가축이 끌게 하던 연자매는 거의 보기가 힘들고, 맷돌만이 아직 우리 주변에 남아 있어 불린 콩이나 녹두를 가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맷돌은 위짝과 아래짝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짝 가운데 중쇠가 있고, 여기에 위짝의 구멍을 맞추어, 맷손이라고 부르는 나무 손잡이를 돌리게 되어 있다. 맷돌은 자주 남녀에 비유되기도 한다.『춘향전』을 보면 이도령이 춘향을 보고, “너는 죽어 맷돌 위짝이 되고, 나는 밑짝이 되어 이팔처운 홍안미색들이 섬섬옥수로 밑대 줄잡고 슬슬 돌리면 천원지방(天圓地方) 격으로 휘휘 돌아가거든 나인 줄 알려무나.” 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또 우리 날라에 산재하고 잇는 홍수설화(洪水說話)에도 맷돌이 등장한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은 죄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큰비를 내려 죄 많은 사람들을 모두 없애 버렸는데, 이때 남매만이 뗏목을 타고 하느님의 구원을 받았다. 이들이 가장 높은 산 상봉(上峰)에 도착했을 때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죽고 없었다. 할 수 없이 남매는 하는님의 뜻을 묻기 위해 오빠는 동쪽으로, 누이는 서쪽을 향해 각각 맷돌 한 짝씨을 굴렸는데, 산을 내려와 보니 맷돌 두 짝이 포개져 있었다. 이것으로 하는님의 뜻을 알게 된 남매는 혼인하게 되었고 우리 민족이 이들 남매의 후손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모두 우리의 선민(選民)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 pp.185~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