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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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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자살

: 조선 임금 이호의 기이한 일생

설흔 | 단비 | 2013년 10월 0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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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10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212쪽 | 310g | 147*212*20mm
ISBN13 9791185099156
ISBN10 1185099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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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갈 길은 실로 멀고 먼 길이었다. 권세에 대한 유혹이 일었다. 머리를 흔들어 그 유혹을 지웠다. 그 유혹에 굴복하기에는 지금까지 너무 먼 길을 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다시 한 번 마비가 찾아왔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오른손에 힘을 주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몸이 온전해질 때까지 의붓어미는 꼼짝도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내 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 왼손으로 얼굴을 살짝 만져 보였다. 의붓어미는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었다. 처음의 웃음과 하등 다르지 않았으나 나는 결코 그 웃음을 심상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처소로 돌아와 밥 한 숟가락을 먹었다. 내시를 불러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고 말하라고 단단히 이른 뒤 『근사록』을 폈다.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다.
“어미의 잘못을 바로잡을 때는 지나치게 강직해서는 안 된다. 자식은 어미에게 마땅히 부드럽고 공손한 마음으로 보필하고 인도하여 의를 얻도록 해야 한다.”
너무도 멀고 먼 도의의 길에 그만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비에게 도의를 전하려는 조광조의 처소는 늘 깊은 한숨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나는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새벽이 올 때까지 『근사록』을 읽고 또 읽었다.
---「5장 증삼은 노둔한 자질 때문에 결국 도를 얻었다」

의붓어미가 숟가락 들기를 권했다.
“드십시오.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는 살 수가 없기에 먹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죽는 날까지 내뱉어서는 안 되는 말이었으므로. 또한 나를 정확히 읽고 있는 의붓어미에게는 무의미한 말이기도 했다. 의붓어미는 내가 한 숟가락의 밥만으로 하루를 버틴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밥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은 후 숟가락을 놓았다. 의붓어미가 빙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참으로 묘하게도 선왕을 닮으셨습니다. 배운 것도 없는 이 어미는 도저히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의붓어미는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너무 맛있어 보여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지 않았다간 의붓어미 앞에 다가가 입을 벌릴 것만 같았다. 의붓어미는 내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또다시 젓가락을 들어 고기 한 점을 집었다. 그대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의붓어미의 처소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는 내 처소에 돌아올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근사록』을 펼쳐 읽었다. 의미심장한 구절이 나를 맞이했다.
“감정에 격하여 목숨을 버리기는 쉬우나, 조용히 의로움으로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조용히 의로움으로 나아간다. 조용히……. 그 구절을 한 자 한 자 소리 내어 읽자 비로소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눈을 감았다. 싸움은 이제 막바지에 도달해 있었다. 싸움은 어떻게든 끝날 것이다. 끝나는 그 날까지는 버텨내야만 했다.
---「6장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밤새워 『근사록』을 읽었다.
의붓어미 앞에서 읊은 장횡거의 문장이었다.
의붓어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내겐 너무도 아름다웠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문장이라 너무도 아름다웠다. 내가 원하는 세상이, 내가 얻고자 하는 세상이 바로 그 문장 속에 있었다.
“건은 아버지라 부르고 곤은 어머니라 부른다. 나는 아주 작은 존재로 천지와 뒤섞여져 그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것을 내 몸으로 삼고, 하늘과 땅을 거느리는 것을 나의 본성으로 삼는다. 사람들은 나의 형제이며 만물은 나의 동료다. 대군은 내 부모의 종자이고 대신은 종자를 보좌하는 사람이다. 연장자를 존경하는 것은 자기 집 어른을 모시는 것이고, 외롭고 약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집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무릇 천하의 노쇠한 사람, 불구자, 형제 없는 사람, 아들 없는 사람, 홀아비, 과부 등은 모두 나의 형제 가운데서 불행에 처해 있으면서도 하소연할 데가 없는 사람이다. 하늘을 두려워하여 스스로를 잘 보전하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함이요, 하늘의 섭리를 즐거워하고 또 걱정하지 않는 것은 순수한 효도다. 부모인 천지의 뜻을 어기는 것을 패덕이라 하고, 인을 해치는 것을 도둑이라 한다. 악을 행하는 자는 못난 사람이며, 자기의 몸을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은 부모를 닮은 사람이다. 사물의 변화를 알면 조상의 사업을 잘 좇으며, 사물의 오묘함을 궁구하면 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고,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다.”
---「7장 너는 내 말을 곡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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