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들은 흔히 불교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질문을 하면 아예 모른다며 한 발짝 물러선다. 몇 십 년을 절에 다녀도 그저 절이나 하고 염불이나 하며 능력껏 시주하여 복을 빌고 공덕을 쌓는 것이 오늘날의 불교 신자로서의 역할이다. 심즉불心卽佛?마음이 곧 부처다?이라고 하였으니, 불자의 마음에 가식이 없고 거짓이 없다면 이러한 불교를 한다고 하여 하등 잘못이 있다고 할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여기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여기서 제시하고자 한다.
흔히 “기독교에서 성경이 차지하는 무게만큼의 권위를 가진 그런 한 권의 불전이 없다.”고 하는 불자를 가끔 만나곤 한다. 이 뜻은 성경 한 권으로 신앙생활에 아무런 의심도 없고, 어떻게 신앙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핵심적인 가르침인지를 스스럼없이 피력하는 기독교인들처럼, 불교도에게 있어서 무엇이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인지, 그 가르침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등의 문제에 관해 의심을 풀어 줄 수 있는 한 권의 경전을 찾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라면 유마경이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불자로서의 신앙생활에 대한 방법론을 논한다면 유마경 한 권이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특히 유마경은 재가불자를 위한 경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식욕에 의해 불교 교리를 철학적 내지는 학문적인 섭렵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유마경 한 권이면 재가불자로서 불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다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를 교리적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은 비단 교리적 이해만을 논하더라도 그것은 부분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전에는 불교 교리로써는 이해 불가의 용어나 사고思考가 인도 문화를 배경으로 가끔 등장한다. 이 뜻은 인도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붓다의 교법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 불전에는 가끔 등장한다는 말이다.
불교가 이미 세계적 종교로 발전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과학적이요, 논리적인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부분을 접할 수 있다. 그것이 교리적인 문제라면, 진리를 토대로 한 전개여서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전법傳法이 잘못되었거나 기록이 잘못된 경우 이외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문화적 배경에 의한 용어 내지는 사고의 표현은 우선 그 지역의 문화를 알지 못하면 붓다의 교법 자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가 다른 지역과 나라에 전파되었으나 그 경전에 깔려 있는 문화적 배경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경전에서 말하고자 하는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사실 이해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이와 같은 문제를 종교사회학 내지는 지정학적으로 이해하면 문화적 배경에 의한 표현뿐만 아니라 비단 교리적이라 하더라도 교법의 이면에 감춰져 있는 다른 차원의 불교관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일체 만물은 항상하는〔변하지 않는〕것이 없다?이라는 구절은 더 이상 불교용어라고 고집할 필요도 없이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이다. 불교 교리적 이해만으로 제행무상을 이해한다고 해서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문구를 인도의 종교와 그것을 근본으로 한 사회문화를 배경으로 할 때 제행무상이라는 불교의 가장 기초적인 교리의 이해는 한층 깊어지고 다양해진다.
브라만〔Brahm?〕이라는 우주의 근본 원리와 아트만?tman이라는 기초 원리를 배경으로 하는 카스트 제도, 이를 근본으로 하는 인도의 사회제도, 그로부터 파생된 인도의 종교 문화와 붓다의 제행무상이라는 교법과의 만남은 단순한 불교 교리만의 해석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불교가 인도에서 태어나서 그 모태인 인도로부터 추방(?)당해야 하는 원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바탕으로 한 지금의 인종 차별적 인도 사회를 보면, 불교가 그 출생지로부터 추방당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뿌리내리기 힘든 종교였다.
불교는 교리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등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인간과 만물을 평등선상에서 본다. 그러나 인도 사회에는 불교가 태어나서 2,5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카스트라는 인간 차별적 계급제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이 뜻은 불교가 카스트 제도로 인하여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지배 계급 또는 기득권자들의 사회 속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카스트 제도 속의 지배계급과 그 기득권자들을 불교가 완전히 제도하여 섭수하였다면, 오늘날의 인도 사회는 적어도 카스트라고 하는 인종 차별적 계급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아니 변해 있어야만 불교가 인도 사회에서 제대로 그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유마경을 번역함에 있어서 그 사상적 배경과 용어에대한 견해를 교리적인 해석뿐만 아니라 종교사회학적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것이 본서에서 다루고자 하는 요점 중의 하나다.
어떠한 종교에서건 형이상학적 표현을 흔히 접할 수 있다. 오랫동안 같은 표현을 접하다 보면 머리로 즉 이성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의 느낌, 감성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표현을 이해하기도 한다. 감성적이라 표현한 까닭은 일상적 경험으로 이해하는 형이상학적 용어의 이해는 지혜 작용이 둔감해진 상태의 무지가 일으키는 오감과 육감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인연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흔히 남자들 사이에서 처음 만나 나누는 대화 중 “이것도 인연인데 한잔 합시다.”라는 말을 서로 나눈다. 그리곤 거리낌 없이 술자리를 만들고, 급기야 거리낌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리는 막역지간의 연緣인 것처럼 변한다. 그 후 감당 못할 사건들이 벌어지고. 좋은 인因(?)으로 시작하여 악연으로 끝맺음하는 비이성적인 묘한 문화 속에서 ‘인연’이라는 단어가 가볍게 쓰이고 있다.
이러한 감성적 행동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인연의 쓰임새다. 인연이라는 말은 연기緣起라는 말과 동의어쯤으로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연기의 의미를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샤캬무니 붓다가 처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내용이 바로 연기법이다. 지극히 이성적인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법〔진리〕이다.
또 다른 예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숭고한 사랑을 논하곤 한다. 이 사랑이라는 말이 어떠한 경우에는 지독한 편견에 의해 남용 당한다. 반면 불교에서는 사랑을 흔히 독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보살의 중생 구제에는 그 바탕에 절대적 인간애가 작용하고 있으며 숭고한 사랑이 깔려 있다. 대승불교가, 최소한 유마경이 보살사상을 지향하는 경전이라면, 사랑을 단순히 독으로 취급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 오히려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 불교다.
불교에서 금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집착을 근간으로 한 욕망을 사랑이라 오인하는 경우다. 그래서 경전상에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용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점이 유마경 번역에 앞서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유마경 번역과 더불어 인도인들의 특이한 사고와 문화를 배경으로 한 형이상학적 용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본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유마경의 번역과 더불어 해설 내지는 잡다한 군더더기를 덧붙였는데, 이는 독자에게 본문 이해와 함께 일반적 불교 교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시도였다. 불교 교리를 연구하는 입장에 있는 분들뿐만 아니라 불교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도 읽힐 수 있는 내용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도한 것이다. 유마경의 심오한 도리에 사족을 붙인 감이 없지 않으나, 독자들 중 단 한 분만이라도 그 사족에 의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한 마음을 일으킨다면 어떠한 핀잔이 돌아오더라도 받아들일 생각으로 시작된 것이다.
유마경은 지금까지 한역본만 존재하고 산스크리트어 사본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 사본이 1999년 7월에 티벳의 포타라 궁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다. 한역본은 현존하는 것으로서 3종이 있는데, 본서에서 사용한 텍스트는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이며, The SAT Daiz?ky? Text Database에서 인출하였다. 번역작업 중 위의 산스크리트어 사본의 연구서로서 2011년 출간된 우에키 마사토시植木雅俊의 범한화대조·현대어역 유마경梵漢和對照·現代語譯 維摩經을 참조하여 산스크리트어 사본과 한역과의 비교에 도움을 받았다.
필자는 오랫동안 책의 출간을 주저해 왔다. 출판에 의한 잘못된 지식의 전달이나 그 남용의 폐해는 거둬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중국 송대의 대 유학자며 주자학의 창시자인 주자朱子는 20대에 대학大學에 대한 주석서를 쓰고, 그 천재적 재능을 스스로가 찬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10여 년 후, 그가 30대에 대학의 주석서를 다시 쓰면서, 20대에 쓴 주석서의 오류를 시인하며 젊은 혈기에 의한 것이니 폐기되어야 한다고 후회의 글을 남겼다. 그리고 40대, 50대, 60대에 들어서도 계속 대학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그에 대한 주석서를 고쳐 쓰기도 했다. 마지막 그의 대학에 대한 견해는 ‘모르겠다’였다.
특히 컴퓨터만능시대가 된 오늘날에는 지식(?)이 공해가 된 지 오래다. 거기에 날개를 단 듯 ‘표현의 자유’라는 의미심장한 사상까지, 그 사상의 해害·무해無害가 검증된 듯 아닌 듯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회자되고 있다. 본서가 또 다른 공해를 낳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2014년 봄
화공 합장
“유마경의 번역과 더불어 해설 내지는 잡다한 군더더기를 덧붙였는데, 이는 독자에게 본문 이해와 함께 일반적 불교 교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시도였다. 불교 교리를 연구하는 입장에 있는 분들뿐만 아니라 불교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도 읽힐 수 있는 내용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도한 것이다.”
-머리말 중에서
유마경은 이 고통의 무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과 그 길을 제시하고 있다. 즉 현실세계가 바로 이상세계라는 것을 불이법문不二法門―이원론적인 대립적 사고의 초월―으로써 설파하려는 것이 유마경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유마경의 가르침은 사바세계에 한쪽 발을 깊숙이 빠뜨리고 있는 나의 운명[인생]을 미래에 내디딜 다른 한쪽 발로써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곳―이상세계―으로 남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의 힘으로 나를 운전해 다다른다는 가르침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