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에는, 여러분이나 나의 마음도 그러하지만, 무언가에 부딪치고, 그것을 부수고 싶다, 파괴하고 싶다는 본능이 있다. 자신의 마음속에 그런 안 좋은 면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세상에서 가장 점잖고 평화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속에도, 들여다보면 난폭하고 싸움을 좋아하는 전쟁을 좋아하는 별난 인간과 마찬가지로, 이 파괴하고 싶다는 욕망은 분명하게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그것이 평화롭게 살아간다면 서로가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인간을 서로 물어뜯고 증오하게 만든다.
마음에는 색깔도 형태도 크기도 무게도 열도 없다. 그것이 마음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마음은 여러분이나 내 주변에 있는 것, 가령 테이블이나 볼펜이나 컵 같은 것과 달리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길이와 크기와 무게를 잴 수도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물을 물질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물질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그다지 알지 못해 온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거기에도 어엿한 이유가 있었다. 마음에는 마음의 진짜 움직임을 자신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은, 알려지게 하면 안 된다는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알게 되면 그것은 불쾌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다.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더럽고 약하고 추악해도 상관없으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자신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다.
귀신은 왜 밤에만 나오는 것인지 생각하면 답을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지만 어째서 낮에는 나오지 않는지를 생각하면 문제 해결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귀신은 밝은 곳에 나타나 정체가 밝혀지는 게 두려운 것이다. ‘귀신인가 하고 봤더니 마른 참억새’라는 속담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밤에 귀신인가 싶어 두려워했던 것이 낮에 보니 사실은 마른 참억새였다. 귀신의 정체 따위 그런 것이라는 속담이다.
자신의 주변에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인간은 그다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낯선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밤이 되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도 안 보이게 되고 왠지 낯선 것처럼 보인다. 그럴 때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태양이 떠서 다시 잘 알고 있는 세계를 볼 수 있게 되면 두려움은 사라져 간다.
관점을 바꿔 말하자면, 인간의 마음은,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인류의 마음이 역사 속에서 발달해 온 길을 더듬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인간이 알에서 시작해 아기가 될 때까지 진화의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 것이다. 그것과 똑같은 말을 인간의 마음의 발달에 관해서도 할 수 있다. 그 진화의 길을 걷는 도중에 멈춰 버린다면, 몸의 경우에는 발육 부진 때문에 기형이 생기기 쉬운데 마음 또한 마찬가지다. 확실치는 않지만 마음도 몸처럼 기형이 생긴다.
인간은 믿음을 통해 안심할 수 있고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유도된다. 그러나 안 좋은 면도 갖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작한 사람은 결코 불행해지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불행에 빠진 사람은 정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노력 여하에 따라 반드시 성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패로 고통받고 있는 불행한 인간을 전부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은 게으름뱅이라고 생각해버린다. 이러한 생각이 이 세상의 불행한 사람들을 죄 없는, 단지 운이 안 좋았을 뿐인 사람으로 보고 모두가 도와서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좋다, 싫다는 두 개의 별개의 감정처럼 생각되지만 그것은 한 사람 안에 항상 짝을 이루고 있다.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라. 여러분은 좋고 싫은 것이 격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어떤 사람, 어떤 물건을 정신없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싫은 것이 있으면 격렬하게 그것을 미워한다. 엄청나게 좋아하기만 할 뿐 싫어하는 것은 전혀 없는 사람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은 사회를 만들어 사회 전체로서 자연의 위험을 막으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자연의 위험이 덮치는 일은 없게 됐지만 사회가 집단으로서 금지함으로써 위험에 다가가는 것들을 막는 게 그 때문에 제 역할을 해왔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면 안전하지만 사회 밖으로 뛰쳐나가거나 내던져지면 곧 약해진다. 우리의 생명은 사회의 바깥으로 내던져지는 것에 의해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규칙보다도 사회의 규칙이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도망치는 것은 무척 비겁한 일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도망친다는 것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에게는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유효한 수단이다. 엄청나게 힘이 세서 싸우면 이기는 게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그게 가장 어렵다. 강해짐으로써 안심하고 싶다는 기분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을 원망(願望)이라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금방 알겠지만 강해짐으로써 안심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최고로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동물이든 태어날 때는 아기이고 아기 때부터 최고로 강한 동물 같은 건 있을 리가 없다. 자신보다 강한 동물이 있는 한 항상 도망치지 않고 싸우려는 본능밖에 없다면 몇 번 그러는 동안 자신이 죽을 차례가 반드시 올 것이다. 이래서는 자신의 안전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이 전부가 다 그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용기라는 것도 실은 두려움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로부터 벌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용기 있는 행동으로 불리는 쪽으로 사람들을 몰아대는 것이다. 결국, 두려움에도 두 종류가 있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두려움과 사회적 인간으로서 가지는 두려움이다. 사회와 개인이 항상 똑같은 적을 갖고 있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때로는 사회가 개인에게 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거기에서 한 인간 안에 두 개의 충동이 대립되는 일이 생겨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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