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의 편익을 추구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녀의 책이 어떤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가가 문제일 따름이다. 학문은 ‘해결책’이 아니라 ‘진실’ 또는 ‘사실’을 통해 기존의 패러다임과 맞서야 한다.--- p.37
『제국의 위안부』를 옹호하면서도 그 주장의 파편만을 임의로 가져오는 글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일본군의 동지인 위안부’, ‘위안부의 기억을 왜곡하는 우리’라는 파편으로 그 책을 말하지 말라. “제국의 일원인 위안부-매춘을 만드는 국가구조-제국의 합법”이란 논리의 흐름과 “한국의 위안부 인식을 왜곡한 배후권력인 정대협”이라는 (박유하의) 전체 주장을 가져와서 그에 대해 항변하라.--- p. 69
아베 신조 수상을 비롯한 정치가는 역사의 사실을 부정하고 개찬(改竄)하며 책임도피를 도모해 왔다. 또한 아우슈비츠의 거짓말에 해당하는 위안부 거짓말이나 남경대학살 거짓말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도, 대중 매체에서 도 표현의 자유란 이름하에 역사의 사실을 부정·개찬하고, (위안부) 피해자를 다시 모욕하면서 존엄의 회복을 방해하고 있다. 우익 정치가나 헤이트 단체뿐 아니라 일부 지식인들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p. 89
박노자 오슬로국립대학 교수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북한 혹은 암묵적으로 중국에 맞서기 위해 한국이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한일 화해론의 근거가 된다면 굉장히 위험한 논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론을 논의하기에 앞서 한번쯤 곱씹어 봐야 할 지적이다. 그러나 이런 점까지 인식하고 발언하는 일본 내의 리버럴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데, 어쩌면 그 점이 일본 리버럴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일지도 모른다.--- p.125~126
즉 박유하 씨의 ‘위안부’상은 일본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이 책이 조선인 ‘위안부’는 소녀도 성노예도 아니고, 일본인 병사와는 “‘같은 일본인’으로서 ‘동지적 관계’’를 가지는 ‘제국의 위안부’로, 지금까지 성노예로서의 ‘위안부’상을 ‘전면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새로움을 가장하면서, 내실은 하타 이쿠히코 씨의 ‘위안부’ 제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해석(=‘전지 공창시설론’)과 우에노 지즈코 씨의 피해자상의 해석(=‘모델 피해자론’)을 합체시켜, 일본군의 책임과 식민지 지배 책임을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적인 ‘위안부’ 담론이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김부자」중에서
이 책이 일본 언론계에서 이토록 폭넓게 예찬 받은 것은 박유하 씨가 일본사회의 지식인의 욕망을 민감하게 감지하여 전전의 대일본제국의 책임 부정과 전후사의 수정이라는 두 가지 역사수정주의에 호소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 현상이라는 것은 일본의 지식인, 언론계의 문제인 것이다. --- p. 243
12·28 한일 외교 합의는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20여 년 간의 국제공조 노력을 헛되이 만드는 일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한국만이 피해자가 아닙니다. 아시아 전역의 피해자들과 그들을 위해 활동해온 전 세계 시민들에게도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p.172
징용소송, ‘위안부’ 소송을 추진하던 당시 “우리는 2차 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있다.” 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21세기 시점에서 2차 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아직도 계속해야 하는 현재 상황이 안타깝지만, 한국의 피해자들은 배리 피셔 변호사님 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에 큰 위로를 받으실 것입니다.--- p.173
「귀향」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장면은 ‘위안부’ 소녀들 중 한 명이 「가시리」를 부르는 장면이다. 그는 평양 권번 출신의 여성으로, 다른 소녀들보다 나이가 많다. 이것은 『제국의 위안부』나 일본 극우들이 말하는 “‘위안부’는 매춘부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장면일까. 그렇지 않다. ‘위안부’들 중에는 강제나 겁박 등에 의해 끌려온 십대 소녀들도 있었고,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따라 나섰지만 취업 사기를 당한 사람들도 있었고, 성매매라는 것을 알고 온 권번 출신의 창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p.191
그런데 박유하는 ‘위안부’ 개인들의 일상을 계속 강조한다. 이것은 마치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같은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알려진 대로 식민지근대화론은 일제강점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암울하고 고통스러웠던 것만은 아니고 나름 살만한 세월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식민지 시기에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시기에 근대화가 되었으니 식민지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가 ‘식민지근대화론’이다. 그러므로 박유하의 주장에 ‘식민지근대화론 위안부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p. 206
결국, 제국의 위안부라는 말은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로 만들어 일본군의 범죄를 면죄해주는데 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안부(성노예) 문제는 단지 일본만의 책임이 아니며 일본 보다 일찍 제국주의 확장을 한 서양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초점을 흐리게 한다. 이처럼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 제목은 일본의 전쟁범죄, 식민지 지배 책임을 희석화, 추상화하고, 축소하는 데 활용된다.--- p. 244
박유하가 “취사선택”해서 발췌한 ‘위안부’들의 ‘좋은 기억’들은 정대협 활동가와 연구소 연구자들이 여러 번 찾아가며 오랜 시간을 들여 끌어낸 증언들이다. 그 증언집에 있는 이야기를 생존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안 했다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당사자들이 “버렸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김복동 할머니도 그러한 기억을 “버리지” 않았다. 그냥 사람들에게 꼭 알리고 싶은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몇 번이고 강조하면서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왜냐,
그런 이야기들이야말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라는 것을 당사자가 더 잘 알기 때문이다.--- p. 271
학자의 양심은 때론 국적을 초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유하의 이러한 우편향 인식은 최근 일본의 집단 자위권을 통한 무력사용 선언과 평화 헌법 개정과 맞물려 설득력이 오히려 더 떨어져 보인다. 이 부분에 와서는 ‘일본 우익 학자 누군가가 쓴 글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갈 정도이다.--- p.296
『제국의 위안부』를 쓴 목적이 이해, 화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이토록 일관되게 가해자 입장은 두루뭉수리 넘어가고, 불행은 피해자 동족인 이웃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이 대체 우리 민족에게 무슨 짓을 저질러 왔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p. 300
‘4개의 터부’(천황제, 야스쿠니신사, 난징학살, 일본군 ‘위안부’ 문제) 외에도 헤이트 스피치 등을 통해 중국, 한국, 동남아에 대해 철두철미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는 점과 일본은 문명국가이고 그 이외의 아시아 국가는 야만국가라는 서구적 가치관을 답습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일본 평화주의의 본질은 이중적이며,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북한에 대해서도 오히려 일본인 납치문제를 들어 일본이 피해자인 양 하는 일본의 민족관, 인간관에 대해 평화 운동가들이 제대로 유효한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있다.--- p.323
일본의 소녀상 철거 요구를 통해 더 깊고 넓은 시야를 갖게 됐습니다. 소녀상은 단지 일본군 ‘위안부’의 위로와 평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평화, 동북아의 평화, 나아가 전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상징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긴장, 대결, 군국주의를 추구하고, 거짓 화해와 평화를 말하는 세력이 소녀상 철거를 원한다면, 소녀상을 지키는 일이 곧 진정한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p.336
박 교수는 위안부 동원이 일본이나 일본군의 ‘국가 범죄’가 아니며, 설혹 범죄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로 ‘업자의 범죄’라고 한다. 동시에 박 교수는 업자의 책임도 크지만 일본정부의 책임도 있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천황이나 일본정부가 성노예제에 대하여 법적 책임이 아닌 식민지배와 관련해서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책임에 관한 이러한 식의 복화술은 책임을 실제로 허구화한다.--- p.341
저자는 “법적 책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면서 자신은 끝없이 ‘뒤틀린 법 도그마’에 빠져들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가 강요한 조약을 내세워 ‘성노예’ 피해자에게 “협력자” “가해자” “무의식적인 제국주의자”라는 지위를 강요한다. 일제가 식민지‘법’에 따라 한 일이니 문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식민 지배, 국가주의, 남성 중심주의, 근대자본주의, 가부장제가 문제라는, 이미 많은 학자가 제시한, 그 자체로서는 타당한 주장은 법적 책임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업자의 책임’으로 왜소화되어 버린다. 그렇게 잎사귀를 강조하느라 줄기를 부정하다 보니 잎사귀만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괴이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p.382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운동은)역사 속에 묻혀 있던 여성의 경험을 가시화함으로 가부장제, 식민주의, 민족주의의 공모 체제에 균열을 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관점에서 거대 역사에 질문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연대는 여성에 대한 전시 폭력이라는 거대한 부정의의 대한 저항이라는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자 투쟁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확대, 유지되고 있는 초국적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근거한다. 이는 젠더, 민족,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축이 교차하는 접점에서의 수많은 차이와 경계를 넘어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과 실천의 의지로 연결된 연대다.
--- p.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