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쿠바에 가기로 한다. 그리고 서울에서의 삶을 벗고 사회주의 속 자본주의적 익명이 되고자 한다. 날기 위해선 생각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 너는 그들에게 동화되기도 하지만, 아주 가끔 그럴 뿐이다. 대부분 너는 그들의 제스처나 옷차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그곳에서 너는 다른 음계의 존재다. 조율되지 않은 채 서걱거린다. 쿠바인들은 네가 내는 불협화음을 듣는다. 그들은 이곳에서 완벽하게 조율된 악기들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피사체가 되고자 한다. 그들은 너의 지갑을 바라보고, 네가 살고 있는 서울의 빌딩 숲을 상상할 것이다. 너는 쿠바인의 관음증을 자극할 것이고, 그들은 네가 서울에 돌아가 네 친구들에게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궁금해할 것이다. 네가 쿠바에 처음 간 것은 2008년이었다. 7년 반 만에 두 번째 여행이다. 너는 낯선 관찰자가 될 테고, 가끔 낯선 피사체가 될 것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그동안 우리는 쿠바를 모른 체하고 있었다. 쿠바와 같은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금지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함부로 평가했다. 가난하고, 물자가 부족한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외면했다. 물 한 통을 사러 세 곳의 가게를 돌아다니는 것을 불편하다고 했다. 우리는 쿠바처럼 되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제 쓰던 샴푸가 오늘 떨어질까 두려워하며 살았다. 돈이 없는 것을 자존심이 없는 것과 동일시했다. 돈이 없어도 당당할 수 있다는 쿠바인들의 생각을 위선이라 폄하했다. 조롱하고 재단했다. 우리는 분명 밖에서 문을 잠근 것 같았다. 쿠바를 가뒀고, 자본주의의 승리를 자축했다. 그들을 국경 밖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 밖의 세계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 걸까?
- 53쪽 중에서
앉지도 못한 채 퉁퉁 부운 두 다리로 몸뚱이를 지탱한 후 바코드 리더기를 손에 들고 100개는 족히 돼 보이는 판촉 상품의 할인율을 정확히 외워야 하는 모표정한 점원을 상대할 일이, 이곳에는 없다. 화장실도 못 가고 땀을 삐질삐질 흘려 대는 점원 앞에서 사소한 실수를 나무라고, 마트 관리자를 호출하고,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를 내세우며 고래고래 소리칠 일도 없다. 계산이 늦는다고 짜증을 부리고 욕설을 삼킬 일도 없다. 딱히 필요할 것 같지 않은 물건을 카트에 집어넣고, 판촉에 속아 두 식구가 먹을 2킬로그램짜리 소시지 덩어리를 사들일 필요도 없다. 여기는 국영 마트다. 너는 그녀에게 ‘나는 손님이니 왕처럼 대해 달라’라고 할 수 없다. 이곳은 모든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을 사는 곳일 뿐이다. 서울의 시간을 버려야 할 때다.
- 66~67쪽 중에서
쿠바에서는 인터넷 관련 인프라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 카드를 사야 인터넷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 곳에서나 되는 것도 아니다. 와이파이 전자파가 흐르는 곳을 찾아서, 기기를 실행한 후, 복잡한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에야 카드 한 장당 한 시간 동안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대부분 외국인 관광객이 머무는 호텔 담장 인근에서 와이파이 전자파가 흐른다고 한다. 사람들은 전자파 사냥에 나선다. 사탕 주위에 꼬이는 개미들처럼 외국인이 드나드는 호텔의 주변을 밤마다 서성이며 쿠바 사람들은 작고 네모난 각자의 기기에 코를 박는다.
- 117쪽 중에서
시스템은 허상이다. 이번만큼은 너에게 ‘명백한’이라는 수사를 허용하겠다. 이런 문장이다. 시스템은 명백한 허상이다. 예컨대 네게 여권이 없다면, 시스템은 널 튕겨낸다. 너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된다. 시스템은 그냥 거기 있음 직한 어떤 환상의 체계다. 네 존재 자체는 시스템의 일원이 될 수 없다. 시스템은 너를 분류하고, 취급하고, 배달한다.
- 146~147쪽 중에서
둥글 넓적한 원형의 물탱크를 이고 다니는 물차는, 유동인구가 많은 아바나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상수도 시설이 부족해 곳곳에 건물의 물탱크를 채워 주는 물차는 오후 4시경이 되면 번잡한 길거리 곳곳에서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 물로 사람들은 생명을 유지하고, 요리를 하고, 몸을 씻어 내고, 여행객을 먹인다. 뜨거운 거리에서 물탱크 안에 가득 찬 물을 상상한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장난스럽게 물탱크에 달린 커다란 수도꼭지를 열어 버린다. 콸콸 쏟아지는 물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어 적신다. 점잖은 너는 입맛만 다시고 있다.
- 165쪽 중에서
전 세계의 빈민은 정치와 시스템의 희생양들이다. 그들은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부작용이고, 모든 시스템의 리더들은(사실 리더라기보다는 집행관일 뿐이다) 그들의 빈곤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선거 때마다 강조한다. 시스템의 악(惡)인 빈곤을 구제하고, 모두가 잘 사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호언한다. 그들은 빈곤을 없애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결코 속내를 들키지 않는다. 사실은 불가능한데.
- 179쪽 중에서
행주 광고는 ‘아니, 그릇 닦던 행주로 싱크대까지 닦아요?’라며 시청자를 구박한다. 그리고 편하게 뜯어 쓰는 일회용 행주를 권한다. 그릇 행주, 싱크대 행주, 테이블 행주, 화장실 행주(아, 화장실은 행주가 필요하지 않구나)를 별도로 두려면, 두루마리 행주를 매번 사야 한다. 광고에서 그러라고 명령하니까. 건조한 집에 가습기를 뒀는데, 어느 날부터 가습기 살균제라는 것이 티브이 광고에 등장한다. 가습기 없이 지낸 세월이 20년이다. 이제는 가습기에, 살균제까지 딸 구비해야 한다. 그리고 가습기 살균제를 팔던 기업은 살인자가 된다. 그러나 기업은 굴하지 않는다. 이 순간에도 인간의 모든 행위는 기업에 의해 세분화되고, 세분화된 행위에 맞는 물품들이 쪼개져 나온다. 끊임없이 사고, 버리고 바꿔야 한다.
- 230쪽 중에서
외국의 친척으로부터 송금받은 돈으로 삶을 꾸리는 쿠바인들이 꽤 많다. 우스갯소리로 쿠바의 경제를 지탱하는 3개의 축이 있다고 하는데, 첫째 수많은 국영 기업을 갖고 배급 시스템을 운영하는 국가, 둘째 달러를 벌어들이는 관광 산업, 그리고 셋째, 외국에 살고 있는 친척들이라고 한다. 이중 경제, 특히 규모가 큰돈이 왔다 갔다 하는 구름 속 경제(그레이 마켓)에서는 그들만을 위한 소비품, 잉여의 상품들이 거래되는 시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에어컨을 가졌다고 부자는 아니다. 남들보다 더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그뿐이다.
- 239쪽 중에서
아바나의 쇼윈도에는 마네킹이 없다. 모자 하나, 티셔츠 하나, 구두 한 켤레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아마 쇼윈도의 개념을 말 그대로 정직하게 이해해 버린 운영자의 작품일 것이다. 사람들은 쇼윈도 앞에 서서 그 쇼핑몰에서 뭘 파는지 알아차린다. 단지 그뿐이다. 자본우의 쇼윈도의 맥락을 가차없이 거세한 저 정직한 쇼윈도가 왜인지 좋다. 너는 가능하면 더 무성의하게, 더 지저분하게 꾸며져 있길 바란다.
- 243쪽 중에서
비교적 작은 도시에 가면 재미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도로 위의 모든 탈것들이 신호를 지키는 모습이다. 느릿느릿 가는 마차도, 자전거도, 그리고 자동차도 모두 평등하다. 복잡한 사거리, 혹은 오거리에서 신호는 중요하다. 마차나 달구지도 붉은 신호등이 켜지면 어김없이 멈춘다. 뒤에 서 있는 자동차도 함께 기다린다. 길을 방해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경적을 울리는 사람도 없다. 자전거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달구지, 마차와 함께 자전거 역시 도로에서 다른 탈것들과 함께 평등하게 운행할 수 있는 하나의 주체다. 신호등이 켜지면 자전거도 멈춘다. 그리고 좌회전 신호, 우회전 신호를 받는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