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선호가 학습을 통해 생긴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현재 우리가 음식을 먹는 많은 방법들은 다소 기이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일례로 아이들의 식사에서 채소를 보이지 않게 ‘숨기려고’ 갖은 애를 쓰는 부모를 생각해보라. 브로콜리를 순진한 아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겨야 할 정도로 그 맛이 정말로 그토록 끔찍하단 말인가? 이 불가사의한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한 요리책들이 아주 많다. 이런 책들은 어린이는 천성적으로 채소를 싫어하고, 채소를 파스타 소스나 달콤한 요리로 만들었을 때에만 자기도 모르게 삼키며, 스스로 서양호박을 좋아하는 법을 절대로 배울 수 없다고 가정한다. 아이들의 성화에 시달리고 수면 부족으로 피곤한 부모들은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이기 어렵다. 그래서 케이크에 비트 조각을 몰래 집어넣으면서 자신의 묘책에 흐뭇해한다. 하! 자신도 모르게 뿌리채소를 먹었다는 건 꿈에도 모르겠지?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비트를 먹을 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결국 케이크에 대한 선호가 단단히 자리잡는 결과를 낳는다. 그보다는 어린이에게 스스로 채소를 선택하는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도록 돕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다.--- p.17
만약 어떤 사람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딱 한 가지 질문만 던져야 한다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신의 유전자는 어떤 것입니까?”가 아니라, “어디 출신입니까?”이다. 만약 콘플레이크를 구하기 힘든 지역에서 살면서 콘플레이크를 좋아하는 소년은 자신의 부모를 짜증나게 하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어린이는 자기 앞에 놓인 것을 먹고(특히 음식이 부족한 시절에는), 따라서 그것을 좋아하게 된다. 경기 불황 때 어려운 시절을 보낸 친구는 내게 “만약 아디릉이 음식에 덜 까다롭게 굴길 원한다면, 가난을 추천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만약 당신이 중국 농촌에서 산다면, 주식인 쌀밥에 투정을 부릴 선택권이 없다.--- p.66
자신의 미각이 건강한 것이 될지 아닐지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방울다다기양배추를 싫어하는 유전자를 가졌느냐 가지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유전적 소질이 음식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다. 환경을 고려한다면, 음식이 풍부하고 정크푸드가 사방에 널린 현재 상황에서는 건강상의 위험은 초미각자보다는 미맹이 더 크다. 여러 연구에서 미맹(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도)의 체질량 지수가 더 높은 경향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를 설명하는 이론은 미맹은 (특정 맛을 보통 사람과 똑같은 강도로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주변의 영향에 더 반응하기 쉽다고 이야기한다. 이들은 초미각자보다 좋아하는 음식을 더 쉽게 배운다. 건강에 좋은 음식 환경에서는 이들은 건강에 좋은 미각을 쉽게 습득할 것이다. 채소를 주어도 이들은 초미각자보다 맛이 쓰다고 해서 거부할 가능성이 낮다. 하지만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좋아하도록 배운다면, 이들 미맹은 여섯 살 무렵에 벌써 비만이 되고 만다(뉴욕의 어린이들처럼).--- p.74~75
만약 좋아하는 것이 익숙함의 결과라면, 어린이는 많은 음식을 맛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좋아하는 음식의 범위가 처음에는 어른보다 좁을 수밖에 없다. 부모가 이 일시적인 조심성을 영구적인 것으로 해석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은 누구나 쉽게 저지르는 실수이다. 음식 선호를 습득하는 핵심 시기는 만 한 살부터 세 살까지의 유아기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어린이의 생애에서 새로운 음식을 맛보는 걸 가장 싫어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모든 어린이는 어느 정도 새 음식 공포증을 겪는다. 공포를 느끼는 새 음식은 새로운 채소일 때가 많지만, 생선과 육류 같은 단백질 음식도 흔하다. 새 음식 공포증은 만 두 살에서 여섯 살 사이에 최고조에 이른다. 새 음식 공포증은 아마도 우리 조상이 야생 자연에서 먹이를 채집하며 돌아다닐 때 독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 메커니즘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타깝게도 새 음식 공포증이 어린이에게 좋아하도록 배울 필요가 있는 음식(채소와 단백질)을 피하게 만들고, 위안을 주는 케이크와 흰 빵과 도넛을 좋아하도록 만든다.--- p.78
섭식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음식은 독이자 치료제인데, 이것은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음식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현실이며,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음식과 잘 조화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섭식 장애는 금주가 치료법인 알코올 중독과는 아주 다르다. 섭식이 잘못 되었을 때, 그 해독제는 음식을 먹지 않는 삶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새로운 음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먹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이다.--- p.363-364
일본인이 우리가 일본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음식을 제대로 먹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부터였다. 전쟁 동안에 일본은 전쟁에 휘말려든 나라들 중 최악에 가까운 굶주림을 겪었다. (중략) 1947년, 미군 점령 당국은 일본 학생들의 굶주림을 덜어주기 위해 새로운 학교 급식 제도를 도입했다. 그전에는 어린이들이 집에서 도시락을 싸왔는데, 밥과 단무지가 다였고, 거기에 가끔 가다랑어 몇 조각이 추가되긴 했지만 단백질은 사실상 거의 전무했다. (중략) 새로 도입된 미국식 점심 급식은 모든 어린이에게 우유와 흰 롤빵(미국 밀로 만든)에 따뜻한 음식 한 가지를 제공했다. 따뜻한 음식은주로 일본군의 재고품으로 쌓여 있던 통조림으로 만든 스튜에 카레 가루로 양념을 해 만들었다. 이런 절충식 점심을 먹고 자란 일본의 어린이 세대는 특이한 향미 배합에 열린 태도를 가진 어른으로 성장했다.(중략) 이것은 무엇보다도 싫어하던 것이 좋아하는 것으로 변하는 미각 이동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전에는 저녁 식사로 나오는 쌀밥에 음식을 한두 가지 이상 차리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새로 얻은 풍요 덕분에 쌀밥과 국과 단무지 외에 음식을 세 가지 이상 차리는 것이 보편적이 되었다. 신문들은 레시피 칼럼을 처음으로 실었고, 수백 년 동안 식탁에서 침묵을 지켜온 일본인이 마침내 높은 안목을 갖고 음식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중략) 마침내 일본인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까다롭고 즐겁게, 그리고 건강에 좋게. (중략)
이렇게 이상적인 것에 가까운 음식을 낳은 일본인의 정신에 필연적이거나 선천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일본인의 식습관에 낙담하는 대신에 용기를 얻어야 한다. 일본인은 식습관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중략) 태어난 곳이 어디이건, 사람들은 먹는 것뿐만 아니라, 먹고 싶은 것과 식사 행동까지 바꿀 능력이 있다. 생강 외에는 양념을 거의 쓰지 않는 ‘향미 원리’를 가진 일본인이 커민과 마늘과 고추로 만든 카츠카레 소스에 푹 빠졌다는 사실은 정말로 놀랍다. 한때 침묵 속에서 식사를 하던 민족이 음식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음식의 즐거움을 높이기 위해 국수를 시끄럽게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는 민족으로 변했다. 따라서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일본인이 변할 수 있다면, 우리라고 변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 p.416~ 419
음식 선호가 학습을 통해 생긴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현재 우리가 음식을 먹는 많은 방법들은 다소 기이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일례로 아이들의 식사에서 채소를 보이지 않게 ‘숨기려고’ 갖은 애를 쓰는 부모를 생각해보라. 브로콜리를 순진한 아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겨야 할 정도로 그 맛이 정말로 그토록 끔찍하단 말인가? 이 불가사의한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한 요리책들이 아주 많다. 이런 책들은 어린이는 천성적으로 채소를 싫어하고, 채소를 파스타 소스나 달콤한 요리로 만들었을 때에만 자기도 모르게 삼키며, 스스로 서양호박을 좋아하는 법을 절대로 배울 수 없다고 가정한다. 아이들의 성화에 시달리고 수면 부족으로 피곤한 부모들은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이기 어렵다. 그래서 케이크에 비트 조각을 몰래 집어넣으면서 자신의 묘책에 흐뭇해한다. 하! 자신도 모르게 뿌리채소를 먹었다는 건 꿈에도 모르겠지?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비트를 먹은 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결국 케이크에 대한 선호가 단단히 자리잡는 결과를 낳는다. 그보다는 어린이에게 스스로 채소를 선택하는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도록 돕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다.--- p.17
만약 어떤 사람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딱 한 가지 질문만 던져야 한다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신의 유전자는 어떤 것입니까?”가 아니라, “어디 출신입니까?”이다. 만약 콘플레이크를 구하기 힘든 지역에서 살면서 콘플레이크를 좋아하는 소년은 자신의 부모를 짜증나게 하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어린이는 자기 앞에 놓인 것을 먹고(특히 음식이 부족한 시절에는), 따라서 그것을 좋아하게 된다. 경기 불황 때 어려운 시절을 보낸 친구는 내게 “만약 아디릉이 음식에 덜 까다롭게 굴길 원한다면, 가난을 추천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만약 당신이 중국 농촌에서 산다면, 주식인 쌀밥에 투정을 부릴 선택권이 없다.--- p.66
자신의 미각이 건강한 것이 될지 아닐지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방울다다기양배추를 싫어하는 유전자를 가졌느냐 가지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유전적 소질이 음식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다. 환경을 고려한다면, 음식이 풍부하고 정크푸드가 사방에 널린 현재 상황에서는 건강상의 위험은 초미각자보다는 미맹이 더 크다. 여러 연구에서 미맹(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도)의 체질량 지수가 더 높은 경향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를 설명하는 이론은 미맹은 (특정 맛을 보통 사람과 똑같은 강도로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주변의 영향에 더 반응하기 쉽다고 이야기한다. 이들은 초미각자보다 좋아하는 음식을 더 쉽게 배운다. 건강에 좋은 음식 환경에서는 이들은 건강에 좋은 미각을 쉽게 습득할 것이다. 채소를 주어도 이들은 초미각자보다 맛이 쓰다고 해서 거부할 가능성이 낮다. 하지만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좋아하도록 배운다면, 이들 미맹은 여섯 살 무렵에 벌써 비만이 되고 만다(뉴욕의 어린이들처럼).--- p.74~75
만약 좋아하는 것이 익숙함의 결과라면, 어린이는 많은 음식을 맛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좋아하는 음식의 범위가 처음에는 어른보다 좁을 수밖에 없다. 부모가 이 일시적인 조심성을 영구적인 것으로 해석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은 누구나 쉽게 저지르는 실수이다. 음식 선호를 습득하는 핵심 시기는 만 한 살부터 세 살까지의 유아기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어린이의 생애에서 새로운 음식을 맛보는 걸 가장 싫어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모든 어린이는 어느 정도 새 음식 공포증을 겪는다. 공포를 느끼는 새 음식은 새로운 채소일 때가 많지만, 생선과 육류 같은 단백질 음식도 흔하다. 새 음식 공포증은 만 두 살에서 여섯 살 사이에 최고조에 이른다. 새 음식 공포증은 아마도 우리 조상이 야생 자연에서 먹이를 채집하며 돌아다닐 때 독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 메커니즘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타깝게도 새 음식 공포증이 어린이에게 좋아하도록 배울 필요가 있는 음식(채소와 단백질)을 피하게 만들고, 위안을 주는 케이크와 흰 빵과 도넛을 좋아하도록 만든다.--- p.78
섭식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음식은 독이자 치료제인데, 이것은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음식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현실이며,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음식과 잘 조화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섭식 장애는 금주가 치료법인 알코올 중독과는 아주 다르다. 섭식이 잘못 되었을 때, 그 해독제는 음식을 먹지 않는 삶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새로운 음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먹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이다.--- p.363-364
일본인이 우리가 일본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음식을 제대로 먹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부터였다. 전쟁 동안에 일본은 전쟁에 휘말려든 나라들 중 최악에 가까운 굶주림을 겪었다. (중략) 1947년, 미군 점령 당국은 일본 학생들의 굶주림을 덜어주기 위해 새로운 학교 급식 제도를 도입했다. 그전에는 어린이들이 집에서 도시락을 싸왔는데, 밥과 단무지가 다였고, 거기에 가끔 가다랑어 몇 조각이 추가되긴 했지만 단백질은 사실상 거의 전무했다. (중략) 새로 도입된 미국식 점심 급식은 모든 어린이에게 우유와 흰 롤빵(미국 밀로 만든)에 따뜻한 음식 한 가지를 제공했다. 따뜻한 음식은주로 일본군의 재고품으로 쌓여 있던 통조림으로 만든 스튜에 카레 가루로 양념을 해 만들었다. 이런 절충식 점심을 먹고 자란 일본의 어린이 세대는 특이한 향미 배합에 열린 태도를 가진 어른으로 성장했다.(중략) 이것은 무엇보다도 싫어하던 것이 좋아하는 것으로 변하는 미각 이동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전에는 저녁 식사로 나오는 쌀밥에 음식을 한두 가지 이상 차리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새로 얻은 풍요 덕분에 쌀밥과 국과 단무지 외에 음식을 세 가지 이상 차리는 것이 보편적이 되었다. 신문들은 레시피 칼럼을 처음으로 실었고, 수백 년 동안 식탁에서 침묵을 지켜온 일본인이 마침내 높은 안목을 갖고 음식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중략) 마침내 일본인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까다롭고 즐겁게, 그리고 건강에 좋게. (중략)
이렇게 이상적인 것에 가까운 음식을 낳은 일본인의 정신에 필연적이거나 선천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일본인의 식습관에 낙담하는 대신에 용기를 얻어야 한다. 일본인은 식습관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중략) 태어난 곳이 어디이건, 사람들은 먹는 것뿐만 아니라, 먹고 싶은 것과 식사 행동까지 바꿀 능력이 있다. 생강 외에는 양념을 거의 쓰지 않는 ‘향미 원리’를 가진 일본인이 커민과 마늘과 고추로 만든 카츠카레 소스에 푹 빠졌다는 사실은 정말로 놀랍다. 한때 침묵 속에서 식사를 하던 민족이 음식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음식의 즐거움을 높이기 위해 국수를 시끄럽게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는 민족으로 변했다. 따라서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일본인이 변할 수 있다면, 우리라고 변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 p.416~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