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를 생략함으로써 글의 뜻이 모호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주로 신문의 제목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아래 제목들은 일간 신문의 제목으로 쓰인 것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1) 외국인들 한국땅 많이 산다.
(2) 김우중 씨 검찰 고발키로/"김우중 씨 검찰 고발"
(3) "우린 인민군 포로 북에 보내달라"
(1)은 외국인들이 한국땅을 많이 산다'의 뜻인지 '외국인들이 한국땅에서 많이 산다'의 뜻인지 얼른 분간하기 어렵다. '산다'를 '구입'의 뜻으로 보느냐 '거주'의 뜻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조사를 달리 붙일수가 있고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본문을 읽어야 한다. 만일 조사를 붙여 두었다면 본문을 읽지 않고도 기사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2)는 증권 선물 위원회라고 하는 기관이 김우중 씨를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신문 제목인데 일간신문들은 한결같이 이런 제목을 달았다. 이 제목은 '김우중 씨가 검찰을 고발키로'. '김우중 씨를 검찰이 고발키로', '김우중 씨를 검찰에 고발키로'등 전혀 다른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기사를 잘 읽어 보면 '김우중 씨를 검찰에 고발키로'의 뜻으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사를 생략하지 않았다면 고민을 하지 않고도 제목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3)은 '우리 인민군 포로를 북에 보내 달라'를 잘못 쓴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기사 내용을 읽어 보면 '우리는 인민군 포로이니까 북에 보내달라'를 그렇게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포로이니까'에서 서술격 조사 '이니까'를 생략하니 이상한 제목이 되었다.
이처럼 문장에서 조사를 생략하면, 의미 파악이 어려워지거나 예기치 않은 반대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2)의 경우에서는 고발한 사람과 고발당한 사람이 달라지는 극단적인 오해도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조사 생략은 신중하게 해야 할 것이다.
pp.178~181
인간의 문명사는 '갈고 다듬음'의 역사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처음 것을 좀더 낫게 갈고 다듬어 문명을 일구어 왔다. 칼, 도끼, 창, 물레, 지게, 수레, 옷, 집 등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이기들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도 처음 만들어진 것보다 더 성능이 좋고, 더 아름다고, 더 정교하고, 품위있게 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인간의 지식과 안목은 언제나 이처럼 그의 창조물들을 조금씩 더 수준 높게 만들었다.
--- pp.311-312
'은'은 한국어에서 가장 독특한 문장 구성을 선보이는 데에 쓰인다. 지금부터는 한국어를 가장 한국어답게 하는 조사 '은'이 만들어내는 기상천외한 문형을 감상해 보자.
a:나는 빨간 장미가 좋다.
b:달은 모양이 둥글다.
위의 문장은 모두 두 개의 주어를 가지고 있다.a는 '나'와 '장미', b는 '달'과 '모양'이 주어이다. 이런 문장은 영어로 번역할 수 없다. 따라서 의역을 하여야 한다. a는 '나는 빨간 장미를 좋아한다'로, b는 '달의 모양이 둥글다'로 생각하고 번역하게 될 것이다. 한국인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인은 두 문장의 의미 차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a와 b의 문장을 구태여 만들어 쓰는 것이다. 이런 멋진 표현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는 언어는 얼마나 불편할까?
--- p.53
여러분은 아래의 시를 잘 알 것이다. 우리 민족의 최고 서정시인이라고 할 만한 김소월의 「산유화(山有花)」라는 시이다. 시의 제목이 너무 단순하고 막연하여 ('산유화'는 '산에 있는 꽃'을 의미한다)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지만, 내용이 마음을 편하고 상쾌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어서, 나는 젊은 시절에 이 시를 무척 좋아했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내가 오십대가 된 지금 다시 읽어도 여전히 젊은 날의 신선한 느낌은 내 마음에 그대로 전해 온다. 내가 여기에 갑자기 시를 적은 것은 김소월이 시를 쓰면서 '에'와 '에서'를 구별한 탁월함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 시에는 산과 꽃과 새가 등장한다. 꽃은'산에' 피고, 새는 '산에서' 산다고 했다. 꽃은 식물이라 움직임이 없고, 새는 동물이라 움직임이 있다. 따라서 꽃은 언제나 산의 일부를 이루지만, 새는 그렇지 않다. 김소월은 이런 꽃과 새와 산의 관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에'와 에서'를 사용했다. 만일 이 시의 첫 연에 있는 '에'를 '에서'로 바꾼다면 어떤 느낌이 날까?
산에서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그러면 산과 꽃이 밀착되지 않고 꽃이 '피는 행위'를 산에서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다시 말하면 꽃이 산의 일부가 되지 못하고 산에서 분리된다. 이렇게 되면 산의 일부가 되어 소리 없이 피어 있는 꽃의 느낌을 담아낼 수 없다. 이런 느낌은 꽃과 대비되고 있는 새로 인해서 더욱 강화된다. 새는 '산에서' 산다고 했기 때문이다. 꽃은 산의 일부로서 존재하지만 새는 산의 일부가 아니고 삶의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주체이다. '에서'라는 조사가 새의 '삶'에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적극성'을 부여한다. 이 얼마나 섬세한 조사 선택인가! 그러나 지금의 문인들은 '에서'를 써야 할 곳에 습관적으로 '에'를 쓰는 경우가 많다.
pp.5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