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를 흔히 천년제국이라고 부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따지면 로마제국의 역사는 약 1,200년 정도가 된다. 로마제국이 기원전 753년에 건국되었고, 서로마제국이 476년까지 지속되었으니 정확하게 계산하면 1,229년간 존속했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오랫동안 대국으로 존속하고 유지된 국가는 없었다. 로마는 오랫동안 강성함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인류 문명에 강하게 남아 있다. 우리가 로마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래서다.
---「천년제국 로마의 역사 개관」중에서
로마의 역사는 구멍가게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인 대규모 기업 집단으로 발전한 글로벌 대기업에 비유할 수 있다. 국가나 기업이 성장하고 생존하는 원리는 동일하다. 하지만 어느 기업이나 국가도 로마처럼 강대하면서도 장기간 존속한 경우는 역사적으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토록 장기간 동안 지속된 원리를 찾는다면 기업이든 국가든 유익한 성장 전략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벤처기업으로 시작한 주식회사 로마」중에서
로마 왕정의 세 왕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로마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감당했다. 초대 왕 로물루스는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2대 왕 누마는 종교와 법의 체계를 세웠으며, 3대 왕 툴루스는 로마가 외부로 확산되어나가는 기틀을 마련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세 왕이 각자 다른 방향에서 로마 초기의 국가 체계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에는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로마 팽창의 기틀을 만들다」중에서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이 시작되면서 왕의 역할은 매년 민회에서 선출되는 2명의 집정관이 맡게 되었다. 초대 집정관에는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가 당선됐다. 브루투스는 시민들에게 “로마는 앞으로 어떤 인물도 왕위에 오르도록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인물도 로마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함으로써 왕정 폐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이렇게 해서 브루투스는 공화정의 창시자가 되었다.
---「시스템과 도덕성이 만든 로마 공화정」중에서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무너진 자존심을 정치 제도의 개혁을 통해 보란 듯이 일으켜 세웠다. 이것이 바로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로마인의 저력이다. 이제 귀족과 평민은 국정의 동반자로서 손을 잡고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주변의 국가들을 하나하나 굴복시키며 로마제국을 건설해나가는 일만 남았다. 단합된 로마의 힘 앞에 대적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리키니우스 법, 평민에게 모든 공직을 개방하다」중에서
로마 공화정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도 부른다. 역설적으로 전쟁이 없었다면 로마 역사도 세계적으로 조명 받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을 끝내려면 평화를 선언해야 한다. 이 평화는 로마가 더 이상 넓힐 영토가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가능했다. 로마 공화정은 전쟁을 통해 고도성장을 계속해나갔으니, 전쟁은 로마의 성장 엔진이었던 셈이다.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략한 한니발 장군」중에서
로마인은 기원전에 2중 국적을 허용한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는 사회, 문화적으로도 개방적이었다. 종교에도 다양성을 인정했다. 자신들의 언어인 라틴어만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점령지의 문화라도 유용하다면 수용해서 로마화했다. 개방성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았고, 여기서 유연성, 포용성, 다양성이 비롯되었다.
---「패자까지 포용하는 개방성」중에서
그리스인보다 지성적으로 열등하고, 체력적으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적으로는 에트루리아인에게 밀리고, 경제력은 카르타고에 딸린다고 인정할 만큼 열등감의 화신이었던 로마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지중해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오노 나나미는 “부족한 지성을 벤치마킹으로 배웠고, 부족한 체력은 끊임없는 훈련으로 보완했고, 기술력은 기술자를 포용하여 보완했고, 경제력은 시장 원리를 받아들여 극복했다”고 설명한다.
---「벤치마킹에 뛰어난, 학습하는 사람들」중에서
공화정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은 로마 지도자의 훌륭한 덕목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재산의 사회 환원을 국가 정책으로 만들어 솔선수범했고 유력자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사재를 내놓아 공공건물을 건설하여 희사한 리더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무엇이었을까? 건물 명칭에 가문의 이름을 새기거나 송덕비에 이름을 남기는 게 전부였다. 지도층에서 솔선수범하고 시민들에게 신뢰를 주었기에 로마 시민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성장의 원동력이 되다」중에서
카이사르는 8년 동안 전쟁을 수행했다. 카이사르는 첫해부터 ‘갈리아 전쟁기’를 직접 기록,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7권을 모아 한 번에 발간했다. 이 책에서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와 정복 상황, 군사적 전략과 기술에 얽힌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적었다. 이 책은 최고의 전쟁 회고록이고, 보고문학의 백미이며, 라틴 문학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기록을 통해 암묵지를 명백지로 만든 지식경영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갈리아 전쟁기』, 지식경영의 모델이 되다」중에서
로마에 온 과학자들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365일 6시간으로 계산해냈다. 이렇게 해서 365일은 1년이 되고, 1년은 열두 달로 나뉘었다. 1년마다 생기는 오차는 4년에 한 번씩 하루를 더하는 방식으로 윤년을 만들어 2월이 29일이 되도록 했다. 마침내 기원전 45년, 태양력이 탄생했다. 이 태양력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력(曆)이라고 불렸다.
---「1년 365일의 태양력 달력을 만들다」중에서
기원전 44년 3월 15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카이사르가 회의장으로 가고 있을 때 한 점술가가 “3월 보름을 조심하시오” 하고 경고했지만 카이사르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암살자들은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에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60명이 넘는 원로원 의원들이 음모에 가담했다고 한다. 이들은 카이사르를 마구 찔러 무려 23군데나 상처를 입혔다. 카이사르는 브루투스를 보자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치면서 숨을 거두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쓰러진 곳은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조각상 발치였다.
---「브루투스 너마저! 카이사르의 암살」중에서
기원전 29년 8월, 승리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사흘 동안 웅장하고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개선식이 끝나자 현실적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산적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갔을까? MBO(Management by objective), 즉 목표 관리였다. MBO는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말한다. 오늘날 경영에서 중시하는 MBO의 원조가 바로 옥타비아누스라고 할 수 있다.
---「MBO의 원조, 철저한 목표 관리」중에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두 명의 핵심 인물이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분신이라 불리는 아그리파와 외교 및 문화 홍보를 담당한 마이케나스다. 아우구스투스는 전쟁터는 아그리파에게 맡기고, 외교는 마이케나스에게 위임했다. 오늘날 기업이 문화예술 활동에 자금이나 시설을 지원하는 활동을 ‘메세나 운동’이라고 하는데, 메세나는 마이케나스의 프랑스식 발음으로, 메세나 운동의 시조다. 1967년 미국에서 기업예술후원회가 발족하면서 이 용어를 처음 쓴 이후, 메세나는 기업인들의 각종 지원 및 후원 활동을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권한 위임의 달인」중에서
오늘날의 서유럽은 로마를 바탕으로 각자 독립국을 건설했다. 미국은 유럽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이룩한 나라로, 미국의 건국자들은 로마 공화정을 모델로 미국의 정치체제를 구상했다. 미국은 국회의사당을 로마식으로 건설했다. 국회의사당을 U.S. Capital이라고 하는데 Capital은 바로 로마의 중심지인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따온 것이다. 미국의 상원의원도 로마의 원로원을 뜻하는 Senatus에서 유래했다. 또한 달력에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이 남아서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래서 몽테스키외는 “아무도 로마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왜 로마인의 후예인가?」중에서
“창업과 승계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
로마제국의 창업자 카이사르와 승계자 아우구스투스의 관계를 말한다. 흔히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창업자가 이룩한 것을 승계자가 지키고 발전시키는 게 쉽지 않아서다. 카이사르는 창업형 리더십, 아우구스투스는 승계형 리더십을 발휘하여 로마제국을 궤도 위에 올려놓았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절묘한 보완 관계에 있다. 성장과 안정, 진보와 보수, 외향성과 내향성, 창업과 승계의 조화를 통해 자신들의 약점과 한계를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처럼 창업하고, 아우구스투스처럼 승계하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