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맞네, 맞아! 역시 우리 무현각의 예언자라니까. 어쩜 이리 내 운수를 그리 알까.”
“에, 알기는 뭐가 아느냐. 내 운수가 하늘 보고 허리 펼 팔자라기에 별 따보나 하였더니 그게 다 꿈이더라.”
“아, 하늘 보고 허리 펴는 것이 아니라 허리 펴고 하늘 본 게지. 너, 이번에 마루닦이에서 대청 기둥 청소로 옮겼으니 허리 펴고, 갉아 먹은 쥐바닥 말고 곁눈으로 하늘 보니 그게 딱이지.”
“그른가? 듣고 보니 딱이긴 한데, 하하.”
얼마 되지도 않는 하급 나인들의 쉬는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눈 한금 같이 짜디 짠 쉬는 시간은, 그래서 더 달디 달고 소중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혹여 한 올이라도 놓칠까 나인들은 재잘재잘 웃음으로 꼭꼭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어제 놀던 주사위를 가지고 오늘은 운수보기를 한다. 말로는 심심해서 본다 하면서도 점괘 주해를 놓을 때는 왠지 모르게 진지하게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이었다. 연방 맞는다, 맞는다, 신통하다 소리가 떠들썩하다.
“거기 청승 떠는 아해야, 필히 곡절이 있음이 분명하도다. 내 너의 곡절을 싸악 풀어줄 터이니 냉큼 이리 와 보거라!”
점괘 해석을 부르던 이가 한야를 부른다. 돌아보는 한야의 모습이 오싹하게 처연하다. 도령이 떠난 후 한야에게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더해졌다. 한야의 상실을 모르는 그네들에게는 저것이 우리와는 출신이 다르다 하는 것인가, 품격이 다르다 하는 것인가, 무심코 숨을 몰아쉬게 된다. 이제는 익숙해진 같이 일하는 방 동무라 편하게 대하가다도 순간순간 그녀에게서는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었다.
“지는 꽃이 아름다워서, 그만. 그나저나 그놈의 주사위는 참 쓸모도 많다. 어제는 주사위 놀이를 하더니 오늘은 점을 보아?”
그이의 입에서는 하마터면 꽃보다도 네가 더 아름답다, 라는 탄식이 나올 뻔하였다. 한들한들 꽃비가 나리는 사이로 긴 머리 늘어뜨린 날씬한 미인이 손바람에 휘말릴까 차마 섬섬옥수 내밀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이가 애틋함에 대해 배운 것이 없지마는 어쩐지 울렁이는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서 간질이는 것이었다.
“어머머, 얘가 이래요. 너 오늘 점괘 들어보면 이 주사위가 보통 주사위로 보일 줄 알아? 가슴 보퉁이에 꼭꼭 싸매서 모시고 다닐 거다. 까르륵.”
낭만을 모르는 이 하나가 나서서 수선을 떤다. 한야는 방금 전의 그 처연함이 거짓이었다는 듯이 금세 웃으며 남들 하는 모양새를 따라 주사위를 탁 던진다. 뱅그르르, 나무로 만든 주사위는 신묘하다는 칭찬이 무색하게 그저 그런 투박한 춤사위로 구르더니 이윽고 멈춘다. 풀이하는 이는 혹시 점괘가 나온 면이 아니라 다른 면으로 엎어질까 조심조심 집었다. 무얼 저리 신중히 드나, 그때까지 한야는 웃고 있었다.
“첫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운명의 상대.”
한야의 입꼬리가 딱 내려갔다. 설마, 설마, 그 사람. 갑자기 숨이 저도 모르게 확 가빠졌다. 잠갔다 생각했던 추억의 끄트머리가 그 한 마디를 듣고 제 주제를 모르고 앞으로 나오려 한다.
“어머, 한야가 집히는 구석이 있는 모양인데.”
누군가 변한 한야의 얼굴을 보더니 속도 모르고 놀린다. 한야는 애써 다시 웃으며 속을 숨기려 변명한다. 잡념을 없애러 가볍게 본 점이었다.
‘심심파적 점괘놀이가 어찌 인생사를 맞추겠는가, 그저 우연이지.’
“얘는, 궁에 짝할 사람이 없는데 저런 게 나오니 이걸 어찌 풀이해야 하나 싶어 그랬지.”
“아모 봐도 그런 표정이…… 아이쿠, 상궁 마마님!”
“이것들, 잠시 밥 한술 뜨라 했더니 언제 살림판 펴랬더냐? 얼른 일하러 가지 못해?”
잠시 다리나 폈을까, 호랑이 같은 상궁은 쉬는 꼴을 못 보고 닦달해 나인들을 도로 일터로 쫓는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한야에게 정말 다행인 상궁이었다. 한야는 즐거운 일도 없는 일터에 부러 바삐 놀려 놀란 마음을 지운다.
'아닐 거야. 그냥 되는 대로 하는 점괘 소리일 따름이야. 그 사람을…… 뜻할 리 없어.'
그렇게 되뇌는 한야의 발걸음은 어쩐지 내딛는 걸음걸음이 진흙탕을 디디는 듯 맥이 빠져 있었다.
일을 나가던 찰나였다. 누군가 불쑥 한야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놀라 머리 위에 올린 물동이가 휘청였다. 하마터면 땅바닥에 깨어져버릴 뻔한 물동이를 단단히 붙잡고 눈앞을 살펴보니, 튀어나온 이는 여자였지만 궁녀의 복색은 아니었다. 트레머리가 아니라 땋은 머리니 궁에 드나들 신분의 귀부인도 아니었다.
“어머? 너 정말 예쁘다. 너만큼 예쁜 애 본 거 처음이야.”
물동이를 깨뜨릴 뻔한 그 처자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뜬금없는 없는 말을 던지더니, 갑자기 허리를 쑥 숙인다. 뒷짐을 진 채 당황해서 꼼짝도 못하는 한야를 세워두고는 둘레둘레 돌아본다. 한야는 마치 자기가 물레 위의 도자기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뱅글뱅글 돌며 꼼꼼히 감정을 끝낸 그녀는 이윽고 씩 웃더니 씩씩하게 외쳤다.
“흐음. 그래도 내가 더 예뻐!”
하얀 얼굴에 눈웃음 담뿍 고이는 반달눈. 둥근 이마가 예쁘게 드러난 앞머리는 살짝 애교머리. 그 여자는 어쩐 일인지 한야와 똑 닮아 있었다. 어디가 닮았다고 하면 콕 집어 어디라 할 수 없는데, 묘하게 닮은 느낌이 많은 소저였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자화자찬이었다. 그러나 한야에게는 그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는커녕, 갑자기 당한 봉변에 정신이 없었다.
산토끼 같은 여자였다. 어쩐 영문인지 묻기도 전에, 아니 머릿속으로 무언가 당했다고 깨닫기도 전에 여자는 나타날 때처럼 휙 용수철같이 뛰쳐나갔다. 다른 관심 가는 무언가가 그녀의 시야를 순식간에 점령한 모양이었다. 같이 오던 나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예전부터 너 보면 누구 생각난다 싶었는데. 오늘 보니 승희 낭주랑 너랑 바꿔쳐도 모르겠다. 낭주도 자화자찬 한번 요란하게 하시네. 저러고도 밉지 않은 게 또 승희 낭주 매력이지만 말이지.”
그러나 한야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데 온통 정신이 쏠려 있었다. 어지러이 승희를 쫓아간 눈동자가 승희의 옆에 선 사람에게 꽂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몇 년 만에 다시 보는, 꼭 한번 다시 만나기를 빌었고 혹은 절대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빌었던 연인의 등에 말이다.
“와, 도련님! 여기 있을 줄 알았사와요. 나, 아니 저, 여기서 도련님과 만나다니이. 역시 운명 인가 봐요.”
승희가 애교스럽게 말꼬리를 늘리며 세건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한야의 눈에는 그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저 아가씨가 하인이 그때 말했던 위세건의 새로운 연인이겠지,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다 지우고 오직 위세건만 보고 있었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났다고 어떻게 잊으랴. 한야, 하고 부르던 그의 낮고도 다정한 목소리. 내게만 붙잡혀주던 따뜻했던 팔.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단번에 찾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던 그,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나오던 뒷모습을 말이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종소리가 울리겠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열 다섯, 손을 놓는 그 순간부터 나는 그가 돌아올 날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어느 날 그가 처음 만난 날처럼 다시 잠시 놓았던 내 손을 강인하게 붙잡으면, 잠긴 꽃봉우리들이 제철도 아닌데 일시에 피어오르겠지. 옛 이야기처럼 다시 만난 그는 장원급제 어사화 꽂고 청옥 띠를 자랑처럼 둘렀겠지. 기쁨에 내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며 흰 진주알로 아롱아롱 떨어지겠지. 금의환향 행렬이 동리 밖부터 내 규방 앞까지 이르겠지. 그리고 붉은 가마가 색을 잃었던 내 규방 앞에 대령되겠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 귓전으로 들은 지 한참 전에 지나고, 창에 일렁이는 밤 벚꽃 그림자와 함께 억누를 수 없는 막막한 심정으로 새벽빛을 기다리던 그 나날들을 어찌 잊으랴.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순간 세상이 나와 그만을 위한 천국이 될 거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
시각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제철의 꽃들이 화사하게 피었었다. 기쁨은 없었다. 한야는 모른 척 그의 시선을 피했다.
“잠깐만, 승희 낭주 잠깐만! 팔 좀 놓아봐요.”
세건 역시 한야를 느낀다. 등 뒤가 이상하게 저릿저릿했다. 이상하다, 이런 직감이 발휘될 때는 오직 그녀에 관련했을 뿐인데. 그렇지만 그녀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왜 또,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실망할 걸 알면서도 알 수 없는 어떤 여자를 따라가는 걸까.
“도련님? 어, 도련님 어딜 가……. 또 지긋지긋한 그 여자 타령입니까.”
웃음기 넘치던 승희의 얼굴에 세건이 사라지자마자 피로가 가득하다. 그를 쫓아다닌 지 이제 두 해가 되려 한다. 승희는 날이 갈수록 세건에게 익숙해지다 못해 아예 처음부터 운명의 짝인 것 같아지는데, 세건은 이제 겨우 데면데면을 벗어난 지경이다. 익숙함의 차이라면 차라리 괜찮으련만, 저에게는 그렇게 익숙해지지 않으면서도 옛 연인에게는 도저히 멀어지려 하지 않는 세건이 사랑하지만 참 답답한 사람이다.
“거기 가시는 항아 잠깐만 멈춰 보시오! 꼭 확인해야 할 일이 있소!”
달아나는 여자를 세건이 잡았다. 그럴 리 없는데, 이번에도 분명 아닐 텐데 늘 그렇듯 세건의 가슴은 혹시나 하는 기대로 불안하게 뛰었다. 그러나 여자는 얼굴을 가린 채로 잡힌 팔을 매섭게 뿌리쳤다.
“폐하의 여인인 궁녀에게 손을 대시다니, 이게 무슨 무례이십니까.”
뿌리쳐지는 팔의 아픔이 아픈데도 어딘가 익숙했다.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 언젠가 겪은 장면에 세건의 눈동자가 크게 떠진다. 그러나 여자는 다시 확인할 새도 없이 궁의 미로 사이로 사라진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세건을 보는 승희의 기색이 심상치 않다. 승희는 절대 일어날 리 없는 일을 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예를 들어, 죽은 여자가 다시 살아난 일 같은 일 말이다. 어느 덧 승희의 손은 한야와 함께 있던 나인의 목덜미를 죄어 잡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가 묻는다.
“방금 저 나인이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