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을 각오한 것처럼, 다가오는 모든 운명에 순응할 것처럼 굴더니. 그래, 궁녀로 입궁한 것은 내 선택이었다. 세건과 헤어지기로 한 것도 내 선택이었어. 운명의 갈림길에서 항상 최선의 선택을 했다 믿었었다. 하지만 싫어! 선택의 대가를, 달아나고 싶다고. 도망가고 싶다고! 이건 지불하기엔 너무 큰 대가야. 희생이라 부르며 참기엔 내 어리석음에 자조의 웃음이 나.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안겨야 하다니. 황제는 나에게 그것이 영광이라 하겠지. 맙소사, 내가 그를 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다니!’
번민하는 한야의 등 뒤에서 저벅이는 발걸음 소리가 났다. 움찔하며 돌아선 한야의 입에서 헉 소리가 났다.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등불의 희미한 불빛만으로도 항상 마음속에서 그려보는 세건의 모습을 알아보기에 충분했다.
“어째서 이곳에, 하긴 궁궐의 교위분이시니 당연한 일이로군요. 순찰 중이셨습니까?”
“아니다. 네가 침궁을 떠나는 모습을 보고 당황해 달려 나온 길이다. 이 야심한 밤에 불도 없이 나다니다니 다치면 어쩔 뻔했느냐.”
오늘 밤 침궁에 누가 들었는지 알면서도 침궁 밖을 굳건히 지켰단 말인가. 한야의 입에서 바람소리가 났다.
“제 손을 붙잡고 그동안 기다렸다, 알아달라 하시더니 이제 보니 속도 참 좋으십니다.”
“너를 먼발치에서라도 지켜보고 싶었다. 천하의 바보짓을 네가 시키고 있다. 왜 나를 피하는 것이냐.”
황제의 곁에서 황제의 측근인 세건을 만날 일은 많았다. 거기다 마음이 자석처럼 서로를 강하게 이끄는데, 어찌 만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한야는 번번이 피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피하기도 했고 태나게 부자연스럽게 피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한야는 더 이상 세건을 피할 수 없었다. 피하는 것이 그와 자신을 위하는 거라 다독여도, 거절에 상처받을 세건의 마음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이제는 세건의 마음을 손바닥 보듯이 알 수 있는 터였다. 피하고 거절할 때 찢어지는 자신의 마음은 견딜 수 있었지만, 세건이 그럴 거라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의 시선이 마주치는 날이 늘어갈 수록 한야의 마음은 세건을 허락하고 있었다.
‘왜 하필 오늘 같은 밤에 그를 만나는가. 흔들리는 마음을 아예 넘치게 하는구나.’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궁인과 관리의 구별이 엄격하니 저를 존중해주셨으면 좋겠다고요.”
“먼저 질문한 것은 나다.”
“예의 없는 질문은 질문으로 치지 않습니다.”
“그럼 다시 정중히 묻겠소. 왜 어째서 일부러 내가 올 법한 자리는 사양하며, 우연히라도 나를 만나면 뒷걸음질치고, 내가 그대를 부르면 번번이 못 본 척하는 연유가 뭐요?”
노도와 같은 세건의 질문에 한야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피한 적 없습니다.”
“누가 봐도 피하는 모습이었소.”
“착각이 심하시군요.”
“착각을 계속해보겠소.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피하지도 않겠지.”
“……!”
“손에 꼭 끼고 있는 반지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을 미련하게 속이려 듭니까.”
“이깟 반지 어디에 씁니까, 제 손가락에나 놔두지요.”
“소문에 듣자하니 환관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후궁에서 궁인으로 강등당한 궁인이 있다고 합니다만 혹시 알고 있습니까? 그 귀한 반지를 고이 간직하고 있을 정도면 진즉에 다른 뇌물을 바쳤을 것 같기는 한데 말입니다.”
아니라고 말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혀 몇 번만 굴리면 세건에게 한야가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말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절로 끄덕이려는 고개를 버티기가 힘들었다.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부질없는 거짓말이었다. 마침내 한야는 인정했다.
“그래요! 당신을 사랑해요. 이 궁에 들어온 것을 후회할 정도로 사랑해요. 사랑한다구요, 예전의 그 마음 그대로예요. 그 이상일 수도 있겠죠! 근데 어떡해요, 나는 나가지 못하는 새장의 새요, 뿌리가 박힌 화원의 꽃인걸요.”
“나는 그대가 청주의 낭자 이한야라도 상관없고, 황궁의 궁인 이한야라도 상관없고, 혹은 몸종 이한야라도 상관없어. 그러나 그대는 번번이 신분과 상황을 신경 쓰지. 나를 위해서 불효녀가 되어줄 수 없었어? 내가 괜찮다는데 그냥 내게 응석부리면 안 되나?”
“당신은……, 당신은 정말 멋진 분이에요. 실력도 걸출하고 폐하의 총애도 대단하죠. 나 말고 어울리는 약혼녀도 이미 있어요! 다들 나보고 안 된다 그래요. 하, 내가 봐도 이제 한낱 궁인이 감히 누구 앞길에 먹칠을 하겠어요.”
말을 막을 수가 없었다. 끝까지 괜찮은 척, 끝까지 위하는 척 자신의 기만하는 연기를 한야는 계속할 수 없었다. 그녀는 너무 힘들었다. 오늘 같은 밤에, 세건을 떠나보낸 순간부터 겪은 모든 일에 그녀는 힘들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 이제야 말해. 힘들다고 말했어야지. 나보고 모든 걸 다 버리고 나랑 함께 해달라고 했었어야지. 왜 항상 너와 나의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네가 다 결정해. 왜 그리 이기적이야! 내가 교위직을 버리면 나를 다시 봐주겠느냐? 집도, 아버님도 다 버리고 나와 도망가달라고 하면 도망가 주겠느냐? 네가 없는 미래 따위 한 번도 전도유망한 미래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내 인생에서 네가 없었던 날들은 그저 살기위해 사는 날들이었다. 황제도 나라도 다 너와 견줄 수는 없어. 내가 다 책임질게, 제발 그냥 나를 봐준다고 말해!”
“사랑해요, 사랑해요…….”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우수수 비가 쏟아 내렸다. 뜨겁게 끌어안은 두 연인의 몸을 소나기가 잠기도록 적셨다. 오랜만에 안아보는 익숙한 몸에 울컥 눈물이 흘러 비와 뒤엉켰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