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그날처럼. 남자친구가 내 목을 졸랐다. 그렇다. 멍청한 이야기다. --- p.12
상담 의사는 내게 권했다.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할 것,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것, 집을 깨끗하게 치울 것, 운동을 할 것, 사람들과 대화를 할 것. 나는 그 의사에게 상담을 세 번 받고 그만뒀다. 의사가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들어주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설문 조사라며 어떤 종이를 나눠줬는데, 하나하나 체크할 때마다 고역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 있었다. 당신은 자주 외롭다고 느낍니까, 당신은 스스로가 별 볼 일 없다고 느낍니까, 당신은 감정을 통제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심리 테스트도 그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마지막 줄에는 이런 질문이 있었다. 당신은 피해의식이 있습니까? --- p.14~15
나중에 내 이야기가 알려지고 나서, 누군가에게 실제로 이런 말을 들었다. 내가 그럴 줄 몰랐다고, 그런 일을 당할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맞을 것처럼 보이는 여자란 대체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그는, 내가 만났던 사람은, 만나는 여자를 때리며 죽여버리겠다고 속삭이던 이진섭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일까. --- p.17
그가 나를 구겨진 옷더미처럼 대할 때마다 그 감정을 기억했다. 그는 나를 분명 사랑했다. 그는 단지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또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이전처럼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는 조금 피곤한 건지도 모른다.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 탓에 조금 우울해진 걸지도 모른다. 내가 그를 외롭게 한 건 아닐까. 그러면 내 잘못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걸 헤아리지 못했으니, 먼저 알아채지 못했으니, 잘못한 것이다. 노력하자. 내가 그에게 잘한다면, 그가 나를 보고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끼게 한다면 우리는 처음처럼 행복해질 것이다. 나를 세 번째로 때린 날, 그는 내게 말했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야. 네가 내 안의 다정함을 끌어내지 못하는 거야. 내가 다정해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없겠어?” --- p.22
대체 어떻게 하면 남들처럼 살 수 있는지 모르겠다. 모두에게 쉬운 일들, 적당한 회사에 취직을 하고 주말에는 영화나 책을 보고, 그러다 좋은 상대를 만나서 데이트를 하고 나들이를 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모두 어떻게 그 일들을 다 해내는 걸까. 어떻게 그렇게 다들 뻔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나에게 뻔한 것은 오직 자기 연민뿐인데. --- p.38
결혼의 장벽을 넘으며 수진은 그녀의 출신을 실감했다. 그리고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수진을 빈틈없이 사랑했지만, 그래서 수진 역시 할머니를 사랑했지만. 할머니는 무거운 짐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옆에 있는 한 수진은 영원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열망하고 노력했던 ‘다른 사람’.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우습게 볼 수 없는 사람. 절대 강간당하지 않는 사람. 수진은 단 한 번도 할머니를 원망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수진은 사실 늘 원망했다. 사람들이 그녀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밖에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를 원망했다.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 바로 그것 때문이다. 사실 수진은 누가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술 먹고 한 번쯤 건드려도 상관없다고. 왜냐하면 어차피 쟤는 춘자 딸이니까. 바로 세상의 빚을 모두 짊어지고 있는 애니까! 수진은 몰래 할머니를 원망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자유롭게 살라고 했을 때 수진은 울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울었다. 진짜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서. 할머니, 나는 진작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시 강간당하느니 차라리 강간하는 인간이 되고 말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 p.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