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60억의 인구가 살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중 최소한 절반은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사람들일 테니, 클립, 문고리, 끈처럼 하찮은 것들을 포함해서 평균 1천 개의 사물을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나머지 가난한 사람들은 평균 100개의 사물을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평균적으로 한 사람이 소유한 사물은 550개가 된다. 그런대로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추론에 따라 550개의 사물에 인구 수 60억을 곱하면 지구상에는 어림잡아 3조 3천억 개의 사물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 3조 3천억 개의 사물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 p.16
클립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쉽사리 잊히는 사물에 속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클립을 아주 좋아한다. 클립은 주제넘게 아무 때나 나서는 성가신 물건도 아니고, 시선을 끄는 짓 따위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클립이 자기 인생에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클립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고, 우리의 요구에 따라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고집스럽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다. 눈부시지는 않아도 제대로 자기 역할을 한다. 또한 항상 겸손하게 사실을 밝혀주는 역할도 한다. (…) 서류는 오랜 세월 습기 많은 시골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클립에는 녹이 슬었다. 클립을 빼자, 종이에 움푹 팬 갈색 자국이 드러났고, 손가락에 까칠까칠한 녹 가루가 묻어났다. 하지만 클립은 악력을 잃지 않았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르고 녹까지 슬었건만, 클립은 원래 모습 그대로 자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생색내지도 않고, 거역하는 법도 없이 음지에서, 모략을 꾸미거나 명예를 탐하지도 않고, 무명으로, 쓸모 있게, 영웅적이지도 않고 경솔하지도 않게, 충직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클립은 우리가 지켜야 할 윤리의 일면을 보여준다. --- p.27~28.
그러나 선글라스에는 더 본질적인 요소가 있다. 바로 눈을 은폐한다는 점이다. 선글라스는 쓰고 다니는 가면이자, 감추는 부위가 전도된 가면 -일반적으로 가면은 얼굴에서 눈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감추지만, 선글라스는 얼굴의 다른 부분은 노출하고 눈만을 감춘다-이다. (…) 이슬람 전통에 따라 베일을 쓴 여인과 선글라스를 낀 나체 여인을 나란히 떠올려보자. 베일을 쓴 여인은 눈만 내놓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가리고 있다. 나체 여인은 타인으로부터 시선만을 가리고 있다. 두 여인 중 누가 더 자신을 잘 은폐했다고 생각하는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 문제는 겨울밤을 함께 보내기에 좋은 화제가 될 만하다.--- p.43.
서 있을 때와 누워 있을 때 우리는 같은 세상에서 살지 않는다. 두 세상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앉아 있을 때의 세상, 무릎을 꿇었을 때의 세상, 웅크렸을 때의 세상도 있다. 이런 세상에는 별로 볼 만한 것이 없다. 수직의 삶과 수평의 삶은 본래 평행을 이룰 수 없다. 침대에서는 공간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변한다. 그러면 시간과의 관계는? 누워 있거나 서 있어도 시간이 똑같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같은 느낌이 들까? 같은 생각을 할까? --- p.83.
오늘날 세상의 주인은 사물이라고 결론지어야 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보자. 실제로 인류는 권력도 영향력도 없는 소수 집단일 뿐이다. 언어를 사용하고, 지능이 높으며, 손으로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인간 종족은 이제 힘을 잃었다. 수적으로도 사물이 인간보다 훨씬 더 많아지지 않았던가? 사물은 인간보다 더 오래가고, 더 견고하고, 더 믿음직하다. 사물의 수적 팽창, 수명, 내구성, 조직력, 다양성이 인간의 무관심과 약점을 능가하지 않았던가?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집단적 계획이든 개인적인 존재든 그 열쇠를 사물에게 넘겨주겠다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릴 것인가? 겉으로 보기와 달리 인간이 아니라 사물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 조용히 무방비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사물이 사실은 우리의 사소한 행동마저도 제약하고 있다. --- p.173~174.
여행 가방은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짐의 한계를 통해 여행자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여행자는 최소한의 공간에 최대한의 사물을 담는 법을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단순성과 효율성에 대한 고려, 일상에서 본질을 우선시해서 꼭 필요한 것만을 선별하는 절제, 그러나 품위 유지를 위해 불필요한 것도 약간은 허용하는 여유,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니 만약에 대비하는 면밀함이 필요하다. (…) 여행 가방에는 철학적 금욕, 에피쿠로스적인 면이 있다. 실제로 인간이 생존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제한된 육체의 욕구에 따라서만 처신한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가볍고 편한 가방 하나만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곤 한다. 그 가방 안에는 각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 각자가 가진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런 세상이 틀림없이 더 나은 세상, 더 살기 쉬운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세상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p.194~195.
파리채는 전형적인 철학적 산물이다. 철학 역시 직접적인 실용성이나 결과와 무관하게 순수한 행위로서 존재할 뿐이며, 혼란 없는 평정에 이르기 위해 시도하는 활동이다. 철학 행위는 그것이 제기하는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제외하는 질문으로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철학자의 작업은 대부분 질문을 쫓아버리고, 달아나게 하고, 단번에 날려버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철학자는 지적인 사유와 관련된 것이라면 아무 담론에나 쓸데없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철학자는 공허하고 성가시고 불쾌한 질문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질문을 쫓아버리는 철학자의 파리채에는 단호한 폭력이 요구된다. 어떤 주제, 세계에 대한 어떤 개념 전체를 한마디 설명, 한마디 변명도 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함정이 있는 질문은 듣지 말고, 듣는 척하지조차 말아야 한다. 흥미 없는 일에는 계속 귀를 틀어막고, 시행착오를 걱정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미련할 정도로 자기 사유를 전개해나가야 한다. 그것 역시 하나의 사유에 불과하더라도. --- p.235~236.
사물에 대한 우리 태도는 우리가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만약 우리가 사물에 매료되고 온전히 사로잡힌다면,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된다. 또한 우리가 사물을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우리는 역시 자신에게서 동떨어지게 된다. 그 두 가지 상태 사이에 자리를 잡고 항상 사물을 만날 준비를 하고 우리와 섞이는 사물들을, 우리가 자유롭다고 여기고 있는 우리의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는 사물들을 살펴볼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그 중심에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상태를 지탱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중심에 있을 수 있다.
--- 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