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시대의 지역 간 인구이동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에 계획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한다. ①건국 초기, 신정권 수립에 따라 다수의 공산당 간부가 북방에서 남방으로 파송되었다. ②새로운 공업기지의 건설이나 중서부 지역에서의 삼선건설(三線建設)을 지원하기 위해 연해도시의 많은 기술자,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이동했다. ③신장(新疆), 헤이룽장(黑龍江), 윈난(雲南) 등 변경 지역의 개간을 위해 산둥, 허베이 등지로부터 조직적 이민이 행해졌다. ④연해도시 소재 기존 대학들의 일부 학부가 중서부로 이전된 것에 수반하여 많은 교직원이 이동해야 했다. ⑤도시의 취업난 등으로 수많은 중?고졸자, 노동자, 간부들이 농촌 지역으로 하방되었다. 그 결과 인구이동의 방향이 일본 등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관측된 것과 반대로 선진지역에서 후진지역으로, 도시에서 농촌으로의 방향이었다. 또한 인구이동의 방향을 규정한 것도 소득 격차 같은 경제적 요인보다 정치적 요인 쪽이 강했다. (31~32쪽)
2005년의 유동인구 총수는 1억 4,735만 명이었는데 그 지역적 분포가 현저하게 편향되어 있다. 광둥, 장쑤, 상하이, 베이징, 푸젠 등 경제 발전이 빠른 연해 지역에는 호적을 고향에 남겨놓은 채 이동한 유동인구가 수백만 명에서 수천만 명에 이르렀다. 광둥의 2,665만 명은 특히 많은 것이지만, 타 지역으로부터의 성제 이동을 보자면 창장(長江) 삼각주(상하이, 장쑤, 저장)와 베이징에도 공통된 특징이 보인다. 그것은 전체 유동인구에서 차지하는 성제 이동의 비율이 높다는 점이다. (49~50쪽)
1990년대 들어 대외개방이 가속화되고 외국 자본의 연해 진출이 급증했다. 광둥성, 상하이시 등의 연해 지대에서는 그 지역 출신의 노동력 공급이 시장의 수요 확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정책적으로는 대규모의 지역 간 노동 이동이 장려되지는 않았으나 내륙 농촌의 수많은 청년들이 홍수처럼 급여가 높은 연해지대로 흘러들어 갔다. 당시는 대규모 인구이동에 대응할 행정 능력이 없어 도시 인프라가 일시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했고 혼란에 따라 범죄가 다발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때의 인구이동을 ‘맹류’, 즉 목적 없는 유동이라고 불렀고, 그에 대한 단속이 실시되기도 했다. (79~80쪽)
농민공은 도시에서 사용되는 단순 노동력에 불과하고, 그들 중에는 보통의 가정생활이 가능하지 않은 자가 많다. 그들은 2000년 이래 기혼자 비율이 상승하고 있고 자녀를 가진 자도 늘고 있다. 사람이라면 보통 가족과 함께 살지만 농민공에게는 그것이 사치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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