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이 제목을 제안하면서 나는 처음에는, 내게는 오늘날의 담론을 지배하는 것 자체를 조직하는 것처럼 보이는 신들림의 모든 형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의 무질서가 자신의 신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를 정착시키려고 시도하는 순간에 어떠한 마르크스의 모든 환영들을 물리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헤게모니는 항상 억압을 조직하고 따라서 신들림을 확증한다. 신들림은 모든 헤게모니의 구조에 속해 있다. 하지만 나는 처음에는 『공산당 선언』의 서두는 염두에 두지 못했다. 마르크스·엥겔스는, 겉보기에는 상이한 의미로, 이미 1847~1848년에 거기에서 유령 및 좀더 정확히 말하면 “공산주의의 유령”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낡은 유럽의 모든 열강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유령이자, 그 당시에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었던 어떤 공산주의의 유령에 대해. 분명히 이미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의인 동맹이나 공산주의자 동맹보다 더 이전에) 공산주의지만, 그 이름을 넘어서 아직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던 어떤 공산주의에 대해. 이미 약속된, 하지만 단지 약속되기만 했던. 어떤 이들은 그만큼 더 두려운 유령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그렇지만, 단 이는 장래와, 어떤 유령의 되돌아옴을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그렇다. ― 88~89쪽
환영들에 대한 이러한 적대감, 때로는 웃음을 터뜨림으로써 공포감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곤 하는, 이러한 공포에 질린 적대감은 아마도 마르크스가 그의 적수들과 항상 공유했던 게 될 것이다. 그는 또한 환영들 및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모든 것, 곧 결코 나타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현상도 그 반대도 아닌 어떤 허깨비/출현의 재출현을 푸닥거리하려고 했던 게 될 것이다. 그는 『공산당 선언』이 전쟁을 선언하는 낡은 유럽의 모의자들로서의 환영을 푸닥거리하려고 했던 게 될 것이다/그는 『공산당 선언』이 전쟁을 선언하는 낡은 유럽의 모의자들과 같이 환영을 불러오려고 했던 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쟁이 얼마나 불가피한 것으로 남아 있든 간에, 이러한 혁명이 얼마나 필연적인 것으로 남아 있든 간에, 그는 유령의 유령성을 축귀3분석하기 위해 그들[구 유럽의 동맹자들?옮긴이]과 모의한다. 그리고 이는 오늘, 아마 내일도,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이다. ― 107~108쪽
하지만 데리다는 이러한 푸닥거리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유령은 계속 다시 망령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유령은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고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것인 한에서 결코 소멸할 수 없으며, 언제든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다면 늘 다시 돌아와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견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러한 주장은 사실은 몇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가 소멸하지 않고 계속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면,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유산 없이는 누구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데리다가 3장에서 말하듯이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찬양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출현하고 있는 “열 가지 재앙”(실업, 빈곤, 망명 및 이주, 경제전쟁, 자유 시장의 모순, 종족 간 전쟁, 외채 등)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에 대한 상속은 필수적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