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서울병원과 함께 서울대학교병원에도 원서를 넣었다. (…) 한 친구가 내 지원 내용을 듣더니 어이없어하며 이렇게 말했다. “야, 우리가 어떻게 그런 델 가겠냐? 서울에서 4년제 나온 애들도 가기 힘든데. 거긴 좋은 학교 나온 애들만 가는 어려운 병원들이야.” 나는 굴하지 않고 내 포부를 밝혔다. “삼성병원을 발판으로 경력 쌓아서 미국 간호사가 될 거야.” 친구들이 모두 박장대소했다. “얘 봐라. 전문대 나와서 존스 홉킨스 가겠다고 하겠네? 하하하하.”
친구가 하도 재치 있게 놀려서 나도 같이 깔깔 웃었다. 지방 전문대에 다니던 우리의 상황에서는 너무 원대한 꿈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 안의 강건한 집념이 그런 대화에도 유연하게 맞장구치면서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주었던 것 같다. ‘니들은 웃어라, 내 꿈은 내가 이룬다!’ --- p.78, 「강건한 목표의 심리학」 중에서
할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올라온 후 열이 많이 났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서 다른 환자들보다 심혈을 기울여 돌봤다. 미온수 마사지를 한참 하고 나서야 열이 내리기 시작했다. 환자가 다소 편안한 모습을 보이자 나도 마음이 놓였다. 그때 갑자기 할아버지가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리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당황해서 어디가 불편한지, 혹은 아픈 곳이 있는지 여쭈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할 말이 있는 듯 계속 손을 흔들었다. 할아버지는 수술 후 기관 내 삽관을 하고 있어서 대화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글자를 쓸 수 있게 손바닥을 내어드렸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천천히 적은 글자는 “감사합니다.”였다. 새내기 간호사였던 내게 할아버지가 전해주신 인사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아직까지도 그 온기가 생생하다. --- p.128, 「환자에 웃고, 환자에 울고」 중에서
신규 시절 나는 병원 생활이 너무 힘들고 고됐다. 첫 2년 동안은 단 한 번도 월차나 병가를 쓰지 않고 일해서 더 지쳐갔던 듯하다. 한번은 심한 감기에 걸려 열이 끓고 오심과 탈수 증세가 심한데도 수액을 팔에 꽂고 폴을 끌고 다니면서 나이트 근무를 한 적도 있었다. 몸도 많이 상했지만 마음고생이 더 심했다. (…) 마음에 맞지 않는 선배와 일하는 날이면 그냥 내 몸이 사라져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고, 태움(선배 간호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혼나는 것을 은어로 태움 당한다고 표현한다. ‘재가 될 때까지 활활 태운다’는 뜻)을 당하고 모욕적인 말을 들을 때는 이대로 병원을 박차고 나가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렸다. 간호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 p.140, 「버티는 기술도 필요하다」 중에서
뭐든 긴가민가할 때는 무조건 물어보자. 물어보면 혼날 게 뻔할 때 머릿속에서 자꾸 ‘맞을 거야, 맞았던 것 같아.’ 하는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그 목소리, 들어선 안 된다. 큰 실수를 하는 것보다 혼이 나더라도 물어보고 넘어가는 게 백번 맞다. 그게 내 간호사 면허를 지키는 길이다. 혼내면서 교육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병원 분위기가 잘못된 것이지, 신규가 묻고 또 묻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들 그런 시기를 거쳤다. 혼이 나면 그냥 훌훌 털어버리자. 혼자 곱씹으면서 그늘진 얼굴로 다니는 것보다 속없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냥 헐헐 웃고 넘기는 편이 낫다. --- p.146, 「버티는 기술도 필요하다」 중에서
‘더럽고 치사해? 그럼 공부해!’ 힘들다고 매일같이 친구에게 하소연하고, 부모님께 죽는소리하는 내가 밉고 싫었다. 그래서 입사 후 3개월 만에 미국 간호사 면허 공부를 시작했다. 데이 근무하는 날엔 퇴근하고 나서 수업을 듣고, 이브닝 근무하는 날엔 수업을 듣고 나서 출근했다. 나이트 근무를 서는 날에도 끝나면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라도 학원에 갔다. 아무리 힘들어도, 가서 졸더라도, 병원을 탈출하고 싶다는 의지가 내 등을 학원으로 떠밀었다. (…) 나 자신을 갈고닦아서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정확히 2년 뒤 퇴사하기로 했다. 사실 공부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목표가 생기자 공부가 취미가 되었다. 간절히 되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이 열심히 공부하면 이룰 수 있는 것임을 안 순간 열정이 절로 샘솟았다. --- p.152, 「나만의 취미 생활 갖기」 중에서
나는 항상 뉴욕에서 살기를 꿈꿨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뉴욕병’에 걸려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 〈뉴욕, 뉴욕〉을 인생의 BGM처럼 깔고 살았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뉴욕 생활이 시작됐다. 매일 아침 나는 출근하는 남편과 같이 집을 나선 후 혼자 카페에 앉아 병원에 이력서를 냈다. 남편이 퇴근하면 함께 저녁을 먹고 거리를 오래오래 걸어다녔다. 데이비드와 손을 잡고 밤공기를 마시며 걷노라면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곤 했다. 그럴 때는 같이 하늘을 쳐다보고 와하하 웃으며 “우리가 드디어 뉴욕에 산다!!” 하고 외쳤다. --- p.257, 「뉴욕, 그래도 뉴욕」 중에서
매니저는 오히려 공부 좀 적당히 하라며 나를 말렸다. 한국에서는 빨리 배우라고 난린데, 여기서는 어째서 공부하지 말라며 난리일까?! “리연,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은 좋은데 너무 그러면 나중에 번아웃이 옵니다. 천천히 하세요.” 내 프리셉터를 맡은 레지나는 처음 일을 시작하고 나서 한동안은 아예 메모조차 못하게 했다. “편안하게 업무 과정을 지켜보고, 설명을 듣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하세요. 우리는 환자 보라고 리연을 혼자 덜렁 던져놓지 않을 거니까 우선은 구경만 하면서 자신감을 길러요. 그것이 우선순위예요.”
베스 이스라엘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며 가장 감격한 점은 모두가 나를 동등하게 대해준다는 것이다. 경력이 나보다 20년 이상 많은 간호사들도 신규 간호사인 나를 동료처럼 대해줬다. 일을 익히는 과정에서도 내가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다그치는 사람이 없었다. --- p.279, 「두근두근 오리엔테이션」 중에서
미국에서는 ‘늦음’의 정의가 한국과 많이 다르다. 여기에서 오는 여유가 나를 무척 자유롭게 해준다. 한국에서 나는 모든 것이 늦은 아이였다. 4년제 대학이 아닌 전문대에 간 것, 스물넷에 학사를 스물여섯에 석사를 따지 않은 것, 남들 있는 자격증을 안 가진 것, 첫 직장에 착실히 붙어 있지 않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느라 경력에 구멍 난 것, 간다는 미국에 빨리빨리 안 가는 것… 사람들 보기에 나는 모든 면에서 늦고 뒤처졌다.
블로그를 시작하고 나서 이런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나이가 많은데, 많이 늦었는데, 나도 가능할까요?’ 물론이다. 우리의 인생에 과연 진짜 ‘늦었다’고 할 만한 게 뭐가 있나 싶기도 하다. 남들의 시선, 남들의 속도, 남들의 기준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서 내 인생, 내 목표, 내 계획에 집중해보자.
--- p.290, 「내가 경험한 미국 병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