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들을 알아주지 않았던 사조에는 고대와 중세의 철학자들이 건축물을 인간의 업적 중 지식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별 볼일 없는 것으로 보았던 편견도 일조했다. 키케로는 건축은 농사나 재봉일, 금속 세공처럼 몸을 쓰는 육체노동으로 보았는데,「도덕서한」에 그는 네 가지로 분류한 예술 중 건축을 가장 하위의 것으로 놓았다. 그가 본 건축은 ‘흔하고 천한’ 일이었다. 단지 손재주를 놀리는 것에 불과할 뿐,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명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은‘유흥 기술’이라 불린 무대장치를 만드는 일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산타 마리아 대성당을 완공시킴으로써 필리포는 건축가의 지성에 대한 세간의 인식과 사회적 지위를 바꾸는 업적을 남겼다. 그의 명성에 힘입어 르네상스 시대 동안 건축이라는 학문은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지성인을 위한 교양으로 변모했고, ‘흔하고 천한’기술이 아니라 문화 창조의 주역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무명으로 남았던 중세의 건축가들과 달리, 필리포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중심틀 없이 돔을 올린 그의 기발한 설계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를 기리기 위해 라틴어로 시가 지어졌고, 그에게 헌정하는 책이 나왔으며, 수많은 문필가들이 필리포의 전기를 집필했다. 그의 흉상이 조각되고 초상화도 그려졌다. 필리포는 신화 속의 인물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필리포는 경이로운‘천재’였다. 원래‘천재’는 독창적인 생각을 하는 이탈리아의 인문 철학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필리포 이전에는 건축가는 물론, 조각가와 화가에게도‘천재’라고 불러준 일이 일절 없었다. 그러나 마르수피니가 작성한 비문에는 필리포를‘신이 내려준 천재’라고 부르고 있다. 바사리는 필리포가 빈사 상태에 있는 건축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의 부름을 받고 온 사람이라고까지 했다. 물론 필리포는 신도 천사도 아닌 인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필리포는 르네상스 시대의 문인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고대 로마나 그리스인만큼 근대인도 위대하다는, 아니 어쩌면 이들보다 더 위대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의 돔은 오백 년 전과 변함없이 피렌체 한복판에 우뚝 버티고 있다. 좁은 피렌체의 골목길을 걷다가도, 길모퉁이를 돌아 광장으로 들어설 때도, 돔은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난다.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의 계단에서도, E. M. 포스터의 소설『전망 좋은 방』의 루시 허니처치의 호텔 발코니에서도, 카페 테라스에서도 항상 곁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서 있다. 날이 좋으면 피렌체 서쪽으로 25킬로미터나 떨어진 피스토이아에서도 돔을 볼수 있다. 15세기 피스토이아 시민들은 돔이 보이는 쪽의 거리 이름을‘비아 델라 파란자’라고 지었는데, 이는‘출현의 거리’라는 뜻이다. 멀리 보이는 대성당은 혁신적인 구조 공학 기술이 벽돌과 돌, 대리석으로 빚은 건축학적 쾌거 그 이상이었다. 피렌체 사람들이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수도원의 프레스코화를 두고 신이 아니면 천사가 그린 것이라고 믿었던 것처럼, 신이나 천사가 아르노 계곡에 만들어 놓은 기적으로 여겼다. 어디에서 보든, 돔은 위대한 수수께끼를 품고 있다. 자연의 법칙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수많은 전란과 암투를 이겨내며 인간의 힘으로 쌓아 올렸기에, 이 거대한 돔은 더욱더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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