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의 개헌 논의가 그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개헌 이슈가 국민에게 밀접하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음에도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여론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사건을 거치면서 1987년 이후 누적된 사회적 모순들을 뒤바꿔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이 반영된 수치라 하겠다. 특히 국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고 행동했던 민주적 경험이 지금의 개헌론을 뒷받침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이 글은 “무엇인가 바꿔야 한다”라는 생각에서 개헌에 찬성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개헌의 방향과 쟁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쓴 것이다. 먼저 개헌이 도대체 왜 중요한지에 대해, 또 헌법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
기한 뒤 지난 70년간의 한국 헌정사를 검토하면서 오늘날의 헌법이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현재 이야기되고 있는 개헌의 방향과 구체적 쟁점들에 대해 대통령직속정책자문기획위원회 산하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와 국회 헌법개정·정치개혁특별위원회의 논의 내용들을 참고해 정리해보았다. 마지막으로 사회 변화에 따른 시대적 과제로서 개헌 과정에서 꼭 논의되어야 할 몇 가지 주제들을 꼽아 독자들과 공유해보려 한다.
--- p.19-20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실시가 확실해지자 개헌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당시 여당인 민정당과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 간의 ‘8인 정치회담’이었다. 민정당과 통일민주당만이 아니라 신한민주당과 한국국민당 역시 개헌안을 제시했지만, 개헌안의 윤곽은 ‘8인 정치회담’에서 이뤄진 합의가 기본이 되었다. 회담 내용이 주축이 되어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에서 헌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이후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로 통과된 개헌안이 ‘87년 헌법’이라 불리는 현행 헌법이다.
‘87년 헌법’은 제2공화국 헌법 이래로 거의 30년 만에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당성을 확보한 개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7년 헌법의 논의 과정을 살펴보면 역시 소수 정치 엘리트의 정치적 합의에 따라 헌법의 골간이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뚜렷하다. 먼저 ‘8인 정치회담’은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개헌안이 마련되기까지 어떠한 논의 과정을 거쳤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우며, 논의 내용 역시 언론보도나 훗날 회고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8인 정치회담에는 민정당 의원으로 권익현, 윤길중, 최영철, 이한동이 참여했고, 통일민주당 의원으로 이용희, 이중재, 박용만, 김동영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이용희, 이중재 의원은 김대중 계열이었고, 박용만, 김동영 의원은 김영삼 계열이었다.
--- p.44
현행 헌법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는 소수자의 권리 하나는 장애인 권리다. 헌법 제34조 5항은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장애인을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이라는 수동적 존재로 정의하고 보호의 대상으로만 바라본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가진 조항이다. 그뿐 아니라 “신체장애자”라는 표현으로 장애인의 범주에서 정신장애인을 배제하는 한계도 드러낸다. 장애인은 독립된 인격체다. 자립적으로 생활하며 사회 참여의 권리를 가진 존재다. 국가는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사회구성원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유럽연합은 기본권 헌장에서 “장애인의 독립, 사회적·직업적 통합, 공동체 생활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통하여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장애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라고 규정한다. 우리 역시 이에 준하는 수준에서 장애인의 권리를 신설해야 한다.
--- p.61-62
살면서 선거제도라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몇 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에서 후보의 공약을 나름대로 읽어보고 꼬박꼬박 투표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민주시민이라는 자부심을 얻기에 충분하다. 이것부터가 꽤 귀찮고 어려운 미션이기 때문이다. 선거는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당선’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함수에 어떤 숫자를 대입하면 값이 도출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이때 함수라는 룰이 달라지면 같은 숫자를 대입하더라도 다른 결과 값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선거 또한 마찬가지다. 선거제도라는 룰이 달라지면 같은 투표 행위를 하더라도 다른 결과가 나온다.
--- p.115
대한민국은 현재 어떤 선거제도를 채택하고 있을까? 국회의원선거를 기준으로 보자. 기표 방식은 범주형이며, 선거구로는 소선거구제를, 대표자 결정 방식으로는 다수대표제(지역구의원)와 비례대표제(비례의원)를 혼합해 운영하고 있다. 2018년 현재 20대 국회의 정수는 총 300석으로, 이중 지역구의원 정수는 253석, 비례의원 정수는 47석이다.
지방선거도 국회의원선거와 마찬가지로 범주형, 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의 혼합형이지만, 기초의원 선거에서 중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데 차이점이 있다. 원칙적으로는 한 선거구에서 2~5인의 후보를 선출할 수 있는 것이다. 대통령선거는 어떨까? 이해를 돕기 위해 굳이 설명하자면, 1명을 선택하는 범주형, 1명만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전국이 하나의 선거구다), 그리고 상대 다수대표제로 운영 중이다.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 논의는 상대 다수대표제에 대한 문제 제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역사적 사례를 보면 제13대 대통령 노태우는 단 36.6퍼센트의 지지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수준이라면 국민 전체에 대한 대표성도, 국정운영의 지속성도 보장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최소한 대통령만큼은 과반의 지지를 획득하게 하는 절차를 만드는 것이 적절하지 않느냐는 것이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제 도입의 배경이다.
--- p.133
한국은 비례대표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선거제도의 비례성은 아주 낮은 나라다.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은 지역구에서 38.3퍼센트, 정당투표에서 33.5퍼센트를 득표했지만 총 의석에서는 그 둘 모두를 뛰어넘는 40.67퍼센트를 차지했다. 더불어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지역구에서 37퍼센트, 정당투표에서 25.5퍼센트를 얻었지만 의석은 41퍼센트를 가져갔다. 이 결과에는 두 가지 모순이 있다. 첫째, 더불어민주당은 지역구에서도, 정당투표에서도 새누리당에 뒤졌는데도 새누리당보다 더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 둘째, 두 정당 모두 득표 비율보다 더 많은 의석을 배분받았다. (…) 낮은 비례성의 원인은 명확하다. 전체 의석의 일부만 비례대표로 선출하는 병립형 비례대표제를 운영하고 있는데다, 지역구 의석에 비해 비례대표 의석이 지나치게 적기 때문이다. 300석 가운데 지역구 의석이 253석, 비례대표 의석이 47석이다. 전체 의석의 16퍼센트로는 기대할 수 있는 비례성 상승효과가 극히 미미하다. 낮은 비례성이 가져오는 효과는 명확하다. 거대 정당에 의석을 몰아줌으로써 다수당 출현은 용이하게 만들지만, 사표를 발생시키고 양당제를 강화하며 다원적 가치를 훼손한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2015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안한 것이 바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다.
--- p.166-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