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작은 공원을 지나 ‘페른하우트 가(Fernhoutstraat)’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모퉁이 빈 공간에 도착하였을 때 헤르만 리덜보스는 집에 있었다. 그는 길 쪽으로 나 있는 1층 응접실의 큰 유리창을 등지고 긴 의자에 앉아 무언가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살색이 그대로 드러난 뒷머리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몇 안 되는 하얀 머리카락이 인상 깊게 눈에 들어왔다. 만 94살이 넘은 그 나이에도 아직 읽어야 할 것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두고 가야 할 이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못 다한 일들에 대한 집착 때문일까? 이제 공부와 같은 일들은 잊음직도 한 나이인데 그는 이전처럼 그렇게 하루를 살고 있었다!
--- '살아있는 거장을 찾아서' 중에서
헤르만 리덜보스의 삶은 평생 성경을 읽고 해석하여 주석 작업을 한 생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에 있어 그는 항상 교회가 물려준 전통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전통을 절대시하는 무조건적인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부모, 즉 앞 세대에게 배운 것을 토대로 살았지만, 자기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학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물론 그는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 때문에 오랫동안 흘러온 기독교 전통을 주저 없이 버리고 신학?신앙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추종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었다. 이런 면에서 헤르만 리덜보스는 전통의 연장선 위에서 살고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 '은퇴 후의 삶' 중에서
헤르만 리덜보스는 신학과 교회의 이 결합관계를 ‘양 날을 가진 칼’과 같다고 하였으며, 이는 다음의 두 방향을 지시한다.
첫째, 신학은 교회의 믿음에 의해 살아 움직인다. 여기에서 그가 의미하는 것은 “신학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학(theologie)은 교회가 하나님과 관계하는 일들, 즉 하나님(theo-)에 관한 말들(-logie)을 연구한다. 이렇게 함에 있어 신학은 교회와의 교제와 연대 속에서 작업을 한다. …… 이 관련성을 부정하고 ― 그의 시대에 경험적 개혁교회가 늘 혹은 자주 그러했던 것처럼 ― 신학과 교회를 양극에서 서로 맞서게 하는 것보다 더 큰 해악은 없다고 보았다. 만약 이런 것을 허용한다면 신학은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며, 따라서 신학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불신과 불안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 둘째, 신학은 교회와는 달리 자신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신학은 하나님(theo-)에 관한 말씀(-logie)이기 때문이다. …… 신학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이 믿는 것들을 다룬다. …… 교회가 왜 이렇게 믿어왔고 다르게 고백하지 않았는가를 묻는 것이 신학이다. 다르게 믿을 수 없었거나 다르게 믿어서는 안 되었던 이유를 찾는 것이다.
--- '학문의 방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