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아래는 갖가지 일로 어수선하지만, 산에 오르면 언제나 정적만 흐른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잔가지 끝에 매달린 누런 잎들을 털어내면 낙엽이 마른 소리를 내며 굴러가고 벌거벗은 나뭇가지가 일렁일 뿐 주변이 갑자기 심연처럼 괴괴하며 정적 속에 묻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라 시선을 주면 겨울 준비에 바쁜 다람쥐 한 마리가 도토리를 입에 물고 숲속으로 달아난다. 산 아래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이 산 아래 일에 무관심할 수는 없겠지만 일단 산에 오르면 그 자신이 산이 되어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이 지닐 수 없는 고차원의 의식을 갖게 된다. 암벽등반 또한 가을에 더 감칠맛이 난다. 여름은 더워서, 겨울은 추워서 그 맛이 별로이지만 가을철 암벽등반은 손맛이 별나다. 오감을 자극하는 차가운 가을 바위의 느낌은 기분을 한층 고양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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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은 자연 속에 나를 묻고 섞는 행위다. 등반에 집중하다 보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그 속에서 산 아래 두고 온 복잡한 일상사를 잊게 되니,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등산은 스포츠요 탈출이며, 때로는 정열이고, 거의 언제나 일종의 종교다.”라고 등산을 찬미한 장 프랑코의 말을 곱씹으며 가슴 가득한 열정과 충일한 기쁨을 안고 노을이 비낀 서북면의 긴 하강루트를 내려왔다. 그 당시 나는 나 자신의 능력보다 더 높고 어려운 곳을 오르려는 오만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무지에서 오는 용기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아무튼 나는 첫 선등에 성공했다.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아찔한 순간이 반복된 등반이었으나 후배 앞에서 두려움을 감춘 채 여유를 보였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내 젊은 날의 허장성세였다. 나는 첫 선등의 성공으로 간덩이가 부어올랐고, 그런 오만함으로 이후 몇 번의 깊은 나락에 빠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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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너의 화려한 등반기록을 보면 엄동기의 활동이 한 차례도 없다. 이에 비해 쿠쿠츠카는 히말라야에서 엄동기 등산 활동이 돋보인다. 다울라기리, 초오유, 칸첸중가, 안나푸르나 등 4개는 동계에 이룩했으며, 초오유와 칸첸중가는 동계 세계 초등이다. 특히 어려운 벽으로 이름난 안나 푸르나 남벽은 남들이 오르지 않은 새로운 길을 뚫고 정상에 올라 8,000미터급 고봉에서 거벽등반의 새로운 족적을 남긴다. 이처럼 쿠쿠츠카는 남들이 꺼리는 어려운 길만을 뚫고 올랐다. 그가 남들이 오른 길을 따라 오른 산은 오직 로체뿐이고, 나머지 모든 산에서는 새로운 루트를 열어나 갔다. 무명의 등산가였던 그가 1979년 히말라야 무대에 혜성처럼 나타나 1989년 로체 남벽에서 낡고 가는 로프가 끊어져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에 오른 고봉 편력은 매우 다채롭다. 41세의 나이로 요절한 쿠쿠츠카의 짧은 인생은 긴 세월을 평범하게 살며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높은 데서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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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부상 전 수많은 바윗길을 개척하며 시적 감흥이 풍기는 독특한 길 이름을 작명한 사람이다. 1989년 경관이 뛰어난 외설악 노적봉에 새로운 길을 열면서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이라는 시적 이름을 붙였다. 이름 덕분인지 많은 사람 이 이 리지를 즐겨 찾는다. 또 그는 북한산 백운대에 ‘시인 신동엽길’, ‘녹두장군길’, ‘김개남장군길’을 열었고, 설악산 토왕골에 ‘별을 따는 소년들’, 도봉산 자운봉에 ‘배추흰나비의 추억’과 설악산 석황사골에 ‘몽유도원도’와 미륵장군봉 에 ‘체 게바라길’을 열었다. 그는 북한산 노적봉에 ‘즐거운 편지’와 홍천강에 ‘별과 바람과 시가 있는 풍경’을 개척하기도 했다. 세상을 떠난 이들, 그리고 더 이상 함께 바위에 오르지 못하는 이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그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추억으로, 가슴 저미는 아픔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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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1일 위쪽 등반자가 떨어트린 아이스툴이 아래쪽 등반자의 종아리를 관통해 중상을 당한 사고가 있었다. 당시 떨어지는 아이스툴이 심장이나 장기 등 신체의 중요 부위를 관통했다면 사망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손아귀 힘이 약한 등반자라면 손목걸이를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손목걸이는 아이스툴의 떨어트림을 방지해준다. 또한 손목걸이는 경사가 심하거나 수직의 얼음에서는 힘을 절약하게 해주는 필수품이다. 최근 첨예화한 고난도 기술등반에서는 손목걸이가 안전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으며 경기 등반에서는 손목걸이를 인공적인 보조물로 간주해 사용을 금하고 있지만, 이는 고급 기술을 구사하는 고수들의 문제일 뿐, 초심자들이 이를 모방하면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등산의 완성은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이다. 어떤 등산가는 “등반은 선택이지만 귀가는 필수다.”라는 말을 남겼다. 귀담아들어야 할 경구다. 등산의 완성은 출발지점으로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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