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 치료는 ‘말하기 치료’이면서 동시에 ‘듣기 치료’이다. 분석 현장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잘 듣느냐 하는 것이 분석 행위의 전부이다. 지젝이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II세』에 나오는 ‘삐딱하게 보기’(looking awry)라는 문구를 따와 라캉적 텍스트 읽기의 전범으로 삼으려 했던 것과 같이 라캉의 분석적 듣기는 ‘삐딱하게 듣기’(listening awry)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삐딱한’ 것은 정신분석이 원래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에 속하고 그것으로 무의식적 왜상(歪像; anamorphosis)을 읽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그 왜상은 정면으로 보면 보이지 않고 삐딱하게 보아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말은 듣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예화로 최근 세간에 떠도는 재담 하나를 소개한다. 흥부가 왜 그의 형 놀부 부인으로부터 주걱으로 뺨을 얻어맞았느냐에 관한 이야기이다. 흥부가 어느 날 놀부집을 방문했는데 마침 그의 형수가 주걱으로 밥을 푸고 있었고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던 흥부가 인기척을 하면서 “형수, 저 흥분데(돼)요”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뺨 맞은 이유라는 것이다. 재담이 재담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그것이 청자로부터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것의 표층구조와 심층구조가 역설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다. 역설이란 전진적 논리와 후진적 논리가 서로 충돌하면서도 하나로 만나는 어느 중간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 재담의 의식적 표층구조는 물론 “흥분데요”이고 무의식적 심층구조는 “흥분돼요”이다. 이 두 구조가 하나의 표현 속에(여기서 ‘데’와 ‘돼’는 유사음으로 취급한다) 공존하면서 충돌하는 전형적인 ‘투인원’(Two in One)의 구조이다. 프로이트가 이러한 텍스트의 이원론적 구조를 고려하여 재담을 그가 말하는 네 개의 무의식의 형성체(나머지 세 개는 꿈, 증상, 언어의 실착)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여하튼, 흥부는 “형수, 저 흥분데요”라고 방문 신고를 했고 놀부 부인은 ‘형수, 저 흥분돼요’라고 ‘삐딱하게’ 알아들어 괘씸죄로 주걱을 한 대 올렸던 것이고 이 논리의 꼬임과 상황의 뒤틀림을 통해 독자/청자들은 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여기서 대타자로서의 분석가의 역할을 떠맡은 주체는 놀부 부인으로서 그는 피분석가의 역할을 담당한 흥부의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의심’해보고 ‘삐딱하게’ 바라보는 ‘의심의 해석자’이다.--- pp.235-236
『쾌락원칙을 넘어서』(1920)에서 프로이트가 제시한 트라우마(trauma)의 정의는 간단명료하다: “우리는 보호 방패를 뚫을 만큼 강력한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외상적’이라고 말한다”(SE 18: 29). 그는 욕동(Trieb)의 설명에서와 같이 충동의 증가와 에너지의 범람으로 자아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위기적 상황에 대해서 ‘보호 방패’(protective shield)라는 강력한 메타포를 써 왔으나 이 경우 그것이 갖는 의미는 단연 압권적이다. 국경수비대요 외부적 공격으로부터의 마지막 저지선인 자아의 방어 방패가 뚫려 그것에 균열이 생기면 그 균열의 틈 사이로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양의 외부적 자극이 내부로 투입되어 정신계에 대규모의 교란 사태가 벌어지고 ‘쾌락원칙’(pleasure principle)이 잠정적으로 중단되는 비상 상황이 연출된다. 이것이 정신적 외상, 트라우마이다.--- p.247
라캉의 『햄릿』론은 포의 ?도난당한 편지?의 분석에서 전형적으로 제시되어 있듯이, 단순히 기존의 정신분석학적 발견들을 문학작품에 적용해 확인해보려는 전통적인 외재적 접근법을 택하지 않고 문학 속에 정신분석학이 있고 정신분석학 속에 문학이 있는, 두 학문이 서로 속에 서로를 포함하는 ‘상호포함관계’(implication)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포 텍스트의 분석에 이어 정신분석 문학비평사상 ‘전례가 없는’(Felman 1987, 44) 이정표를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적용관계에 반해 상호포함관계를 역설하고 있는 펠먼의 표현대로, 이 관계 속에서 해석자의 역할은 “이미 습득된 과학, 기존의 지식을 문학텍스트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중매자로 행동하는 것, 다시 말해서 문학과 정신분석학 사이에서 어떤 ‘상호포함적 의미를 창출해내는 것’, 즉 두 영역의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 교화되고 유식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타자에 의해 영향받고 자리바꿈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다양한 (간접적) 방식들을 탐구하고 밝히며 언표화하는 것이다”(Felman 1982, 8~9). 이것을 라캉의 담론 중 변화하는 대상의 개념을 통해 다시 말해본다면, 적용관계에서 포함관계로의 전환은 『오이디푸스 이후』의 저자들의 표현대로 ‘욕망의 대상’에서 ‘욕망 속의 대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Lupton/Reinhard 68). 라캉의 햄릿 분석에도 등장하는 어휘인 ‘욕망 속의 대상’(object in desire)은 욕망의 대상처럼 대상이 욕망과 떨어져서 외재(外在)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그 대상과 불가피하게 연루되어 있다. 이 관계 속에서 대상은 욕망의 ‘반영’이 아니라 욕망에 의해서 사후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드러난다. 이 욕망 속의 대상이라는 패러다임은 곧 ‘정신분석학 속의 문학’으로 연결되어 셰익스피어의 문학텍스트에서의 정신분석학적 사유의 수사전략을 드러내 보여줄 뿐 아니라 그 문학텍스트가 정신분석학적 담론에 의해 사후적(nachtraglich)으로 다시 쓰이는 상황을 설명해준다.
--- pp.362-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