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어디를 가볼까?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내가 절대 갈 수 없는 곳, 전혀 알지 못하는 곳,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움이 기다리고 있을 곳. 그런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세계지도를 찬찬히 보자 한 군데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곳은 바로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남미. 전혀 알지 못하고 근처에도 가본 적 없지만 그곳에서라면 이 우물 안 개구리 생활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한번 멀리 가보자. 멀리 가서 새로운 세상을 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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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스따뚜라 안티구아 Tostatura Antigua에 가봐.”
한적한 골목 모퉁이의 작고 낡은 가게였다. 좁은 가게 안에는 나무로 만든 낡은 책상 몇 개와 의자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몇십 년은 된 듯한 낡은 로스팅기계와 가스레인지 하나가 전부다. 커피 가게가 아니라 시골방앗간 같은데? 메뉴판을 보니 커피 한 잔이 단돈 600원. 일단 싸니까 좋네. 커피를 주문하자 낡은 작업복을 입은 머리 희끗희끗한 주인 아저씨가 다 찌그러진 주전자를 가스레인지에 올리더니 물을 끓인다. 물이 끓자 우리나라 커피전문점처럼 종이필터 위에 커피가루를 올려 주전자로 멋있게 물을 붓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시커먼 헝겊 같은 것에 커피를 넣고 대충 만드는 듯 보인다. 뭐야, 커피를 이렇게 건성건성 만들어? 현지인들에게 속은 것 아닌가? 낡고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아무런 기대감 없이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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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고 Amigo(친구), 이거 정말 좋아. 바다에서 툴룸 유적 사진 찍고 스노클링도 할 수 있어.”
“나 돈 없어. 200페소면 너무 비싸.”
그러자 그 녀석은 그만 헛다리를 짚는다.
“왜 그래? 너 일본인이잖아. 일본 사람들은 돈 많잖아.”
이 자식아, 내가 어딜 봐서 돈 많은 일본인으로 보이냐? 물 빠진 반바지에 축 늘어진 티셔츠. 택시비 아끼려고 한 시간 넘게 걸어서 온몸은 땀범벅이다. 등에는 배낭 살 때 공짜로 받은, ‘산을 깨끗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씌어진 천쪼가리(?) 같은 간이배낭까지 메고 있는데. 요거 아마 쓰레기 수거용으로 쓰는 걸 거야. 내가 내 모습 봐도 완전 거지꼴인데 일본인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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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미칠 것 같다. 버스기사에게 에어컨 좀 제발 약하게 틀어달라고 사정하려고 갔더니 이런, 2층 버스라 그런지 운전석에 문이 있고 잠겨 있는 것이 아닌가!
‘춥지 않아, 춥지 않아.’ 스스로 최면을 걸며 버틴다. 하지만 계속 이대로 가다가는 ‘ 한국 배낭여행자, 베네수엘라 버스에서 동사.’라는 뉴스가 내일 아침에 나올 것만 같다. 안 되겠다. 그냥 싸대기 한 대 맞자. 마음을 먹고 새벽 2시쯤 아저씨를 흔들었다.
“뭐? 뭐야?”
새벽에 잠이 깬 아저씨는 멍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아저씨, 이 점퍼 좀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지금 추워서 얼어 죽을 것 같아요. 제발요.”
아저씨의 그 황당한 표정이란. 그래도 잠이 덜 깨서 정신이 없으신 모양이다. 점퍼를 주시고는 그대로 다시 곯아떨어진다. 아주 얇은 점퍼였지만 그래도 뭔가 하나를 덮으니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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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놈들을 만나고야 말았다. 여행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등쳐먹고 삥뜯기로 유명한 악질 베네수엘라 경찰! 베네수엘라에서 경찰 눈에 안 띄려고 일부러 걸레같은 옷을 입고 다니며 신경썼는데, 국경에서 딱 걸린 것이다. 구멍 숭숭 뚫린 의자, 다 망가져 덜컹거리는 문, 버스 안까지 풍기는 진한 매연 냄새. 베네수엘라 마라카이보 Maracaibo에서 과테말라 치킨 버스보다 더 고물인 로컬 버스를 타고 콜롬비아 마이카오 Maicao로 가는 길이었다. 국경이 가까워지자 경찰 검문이 계속되었는데 세 번째 검문에서 경찰 한 명이 여권과 내 얼굴을 번갈아 쓱 보더니 버스에서 내리라고 한다. 그러더니 초소에 있는 나이 지긋한 경찰에게 데려간다. 오호라~. 네놈들이 소문 자자한 여행자 삥뜯는 경찰이구나? 사람 잘못 골랐어. 배에 힘 딱, 주고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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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의식이 돌아온다. 깊은 잠에서 깨어날 시간.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비몽사몽 간이라 내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와라스인가? 아니 아직 에콰도르에 있나? 이곳은 어디지? 그동안 지나온 온갖 도시와 숙소들이 뇌리를 스치면서 혼란스럽다. 겨우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인다. 아, 맞다. 여긴 리마에 있는 한국인 민박집이지. 어제 도착해놓고 기억을 못하다니!
그동안 수십 개의 도시, 수십 개의 숙소들을 거치다보니 가끔씩 꿈결에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마음 놓고 몸 누일 곳도 없다는 사실에 우울해진다. 여행 초반의 흥분과 설렘이 사라지고, 하루하루가 여행이 아닌 생활이 되어가면서 가끔씩, 혼자라는 사실이 못 견디게 외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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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남미의 눈부신 아름다움. 내 두 다리로 걷고 내 두 눈으로 본 이 땅은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바꿀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햇살 속에 파랗던 카리브해, 매일 가슴을 뛰게 하던 파타고니아의 대자연, 눈부시게 빛나던 우유니, 나를 압도하던 안데스산맥의 장엄함…….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 못하고 좁은 땅덩어리에 갇혀 살다가 죽었다면 한 번 사는 이 삶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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