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들이 즐겨 쓰는 스펙터클을 피하겠다는 생각에 동의하지만, 여전히 질문들이 남습니다. 진훤 씨의 사진에는 일단 사진 안으로 들어온 시선을 붙잡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진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힘도 충분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사진을 찍는 시대, 이미지가 폭증하는 시대, 자기가 찍어놓은 사진도 다 보지 않는 시대에 ‘이 사진이 액자에 들어가 전시장에 걸려 있으니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거야’라는 맥락적 추측 외에 사진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일 수 있을까요?
--- p.19~20, 「안소현의 첫 번째 글」중에서
길 잃음을 위한 ‘단서’들이 사진 안에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소현 씨의 경우처럼 홍진훤이라는 인간 자체가 단서가 될 수도 있고, 전시라면 이곳저곳에 숨겨진 텍스트가 될 수도 있고, 설치의 방식일 수도 있고, 전시를 하는 장소일 수도 있겠죠. 책이라면 또 다른 많은 단서가 사진 주변에 놓이겠죠. 저는 전시 공간에 가는 일을 작품을 확인하러 가는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시를 경험하기 위한 것이죠. 전시 공간 안과 밖에서 작품을 둘러싼 어긋난 이정표들을 불신하며 길을 잃어보는 경험 말이에요.
--- p.26, 「홍진훤의 첫 번째 글」중에서
진훤 씨의 답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표현을 하나 고르라면 “길 잃음”이에요. 사진에 대해서도, 전시에 대해서도 “얼마나 많은 길 잃음을 생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고 하셨죠. 그건 더없이 멋진 생각이자 표현이라, 저는 의심을 시작했습니다(요즘 모든 멋진 것들을 의심하는 것이 제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아 엄청 불행합니다). 물론 진훤 씨가 말씀하신 ‘길을 잃는다’는 것이 와닿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동의하고 또 동의하지만 역시나 제 역할은 명명으로 충분치 않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진들에서 어떻게 길을 잃었는지 생각해보다 진훤 씨가 찍은 사진 속의 시간의 ‘모양’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진훤 씨의 사진들에서 일관되게 느꼈던 것은 시리즈마다 특정한 시간의 모양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간의 모양이 복잡할수록 저의 헤매는 시간이 길어졌고, 길어진 만큼 고민도 깊어졌습니다.
--- p.70~71, 「안소현의 두 번째 글」중에서
이거 뭔가 사진 같지 않나요? 전 그때 사진의 인덱스가 이런 건가 싶었어요. 과거의 어느 시점에 하이퍼링크라는 아주 약한 고리를 타고 만난 어떤 정보의 일부분만 복제해 따로 저장해 두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리키는 어떤 곳에 그 현실(의미 혹은 정보)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 참 사진적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것은, 구글에서 검색된 링크들을 하나둘 눌러보다 보면 어떤 링크들은 이미 깨져 있다는 거예요. 분명 제목과 내용의 일부 그리고 링크 주소가 (심지어 때로는 이미지까지) 있는데 눌러보면 아무것도 없죠. 제가 관심 있어 하는 사진의 인덱스적 속성은 이 깨진 링크에 있는 것 같아요.
--- p.88, 「홍진훤의 두 번째 글」중에서
달리 생각하면 커다란 상실은 이미지로만 채워지는 것 같기도 해요. 말도, 개념도, 상식도 설명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이미지를 수없이 쌓아 올려야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오랜 고통의 유전자들이 알려주는 것 아닐까요. 저는 사진가들의 체념 어린 반복에서 그 힘을 읽곤 해요. 제가 진훤 씨의 사진을 보면 늘 고통스러운데, 그것을 계속 들여다보고 심지어 전시를 같이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드네요. 진훤 씨의 극단적으로 고요한 사진들은 ‘딱 사진만큼의 규정’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 p.116, 「안소현의 세 번째 글」중에서
역사는 결국 진보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매일 패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여전히 지울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늘 패배하는 것 같은 걸음이라도, 도무지 이정표를 찾을 수 없는 반복되는 길 잃음이라도 어디론가 계속 걸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런 면에서 소현 씨의 “사진이 길 잃음이라는 건, 이제 제게는 한낱 수사일 수 없는 표현이 된 것 같아요”라는 문장이 저에게 ‘최소한의 붙잡음’을 허락하는 문장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 p.125~126, 「홍진훤의 세 번째 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