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집에서 저녁 준비하고 계셔서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큰형과 작은형이 함께 일어났다. 이장님도 신문을 접으시며 일어나셨다.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커피까지는 안 주셔도 되는데.”
“자주 놀러 오너라.”
수정의 말을 뒤이었던 건 이장님이었다. 살긋살긋 잘 웃는 수정이 보기 좋으셨던지, 지금껏 무뚝뚝하게 신문을 보시는 듯하면서도 오가는 대화를 다 들으셨던 것 같았다. 둘째 형 도진이 현관을 나서던 수정을 바래며 말을 이었다.
“그래, 우리 도형이랑도 친하게 지내 줘. 얘, 친구 없고 생각보다 왕따야.”
“형!”
“알았다, 알았어. 아, 이제 상이나 차려 볼까.”
현관에서 슬리퍼를 신으며 수정의 집까지 따라갈 참이었던 둘째 형은 도형의 눈치가 보여 큰형을 끌고 주방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수정은 말없이 뚫어지게 바라보는 도형에게 딱히 할 말이 없어 현관문 쪽으로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현관으로 나가려던 차에 뒤따라 다가온 도형에게 따라 나오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밤에 우는 벌레들이 잔뜩 마당 안으로 몰려들었다. 빗자루 질을 하느라 도준이 켜 놓은 불 때문인 것 같았다.
수정이 현관문을 뒤로하고 반쯤 마당을 지나갈 때 벌컥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서서 인기척을 확인하니 절대로 친절하게 마중해 주지 않을 것 같았던 이도형이었다.
“아, 왜?”
“…….”
마당을 정리하러 나온 타이밍이었던 건가 싶은 마음이었다. 수정은 대답 없이 우물거리는 도형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다시 마당 문을 넘어가려던 참이었다.
“수정.”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는 남자에게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가 마침내 평평한 정류장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응?”
“고맙다.”
“뭐가?”
“제사상에 잘 올리고, 맛있게 먹을게. 고마워. 아주머니한테도 감사하다고 꼭 전해 드려.”
수정은 도형의 낮은 음성에 꼭 무언가에 홀린 듯 눈만 껌벅거렸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꼭 꿈속에서 헤매는 듯 현실감이 없을 만큼 무겁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했다. 믿고 싶지 않았던 떨림의 감정이 정확하게 색을 띠고 있었다.
정말 가을바람이 불었다.
도형의 검은 흑발이 살랑이며 움직이고, 간간이 불어오는 맞바람 사이로 스킨 향이 달큼하게 코끝으로 다가왔다. 너무나도 아득하게 느껴져 순간 눈을 감을 뻔했다.
“그래……. 갈게.”
수정은 다잡은 정신을 붙들고, 도형의 고맙다는 인사도 뒤로한 채 그렇게 마당 문을 넘었다. 그리고 터질 것 같은 볼을 붙잡고 집 안으로 들어서기까지 수 분이 걸렸다.
계절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게 아닐까. 의식하게 되고, 무거운 색감을 띠고 있는 것. 확실히 이 감정은, 봄에 불어오는 바람처럼 마냥 가볍진 않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