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중간 결산을 위하여
말을 하고 글을 기록하며 사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고 민족마다 또 다르다. 나는 살아오면서 반드시 필요한 경우 말고는 앞에 나서서 말을 많이 하거나 글을 자주 쓰는 것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굳이 따지자면, 내 천성이 그렇다는 것에 이유를 돌릴 수밖에 없다. 타고난 나의 마음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완벽주의와 남에게 조금이라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결벽증적 진중함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지금 여기서 ‘1955년생 오진환’의 삶을 쓰려고 한다. 말과 글쓰기에 적극적이지 않던 내가 갑자기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지금까지 짧지 아니한 나의 일생을 이 기회에 정리해 보고, 앞으로의 여정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 함이다. 실제로 이 책을 쓰느라고 과거의 자료를 뒤적여 보고 애써 그때의 일을 기억 속에서 꺼내 보면서, 너무 쉽게 망각하고 헛되게 살아온 것을 발견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생겼다. 새 각오도 다지게 됐다. 김형석 교수는 인생의 황금기를 60세부터 75세까지라고 하였는데, 나는 벌써 60대 중반이다. 인생 황금기를 준비하기 위하여, 좀 늦었지만 지금이 이 책을 쓸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 인생 전반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자 역사다.
둘째,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인생인데,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를 내가 가장 아끼는 가족들에게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물질적인 선물이나 유산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것이 더 값진 것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는 아내와 두 아들 외에 새로 맞이한 며느리들과 손주들이 있다. 아내는 그렇다 치고 아들들의 경우 성장한 후 독립하여 살고 있으므로, 아버지인 나의 삶을 제대로 모른다. 하물며 며느리들이나 손주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에게 내가 어떠한 사람이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록하여 남겨 주고 싶다. ‘화향백리花香百里 인향만리人香萬里’라는 말이 있다. 두고두고 아름답고 그리운 사람으로 기억되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고, 반면교사 삼아 좋은 건 받아들이고 나쁜 건 피하는 계기로 삼아도 좋다. 인생은 한 번 살아 보고 이를 교훈 삼아 다시 살기에는 너무 짧지 않은가!
회고하여 보면 참 다사다난하게 살아왔다. 어느 누가 태어나서 처음부터 로드맵을 만들어 그대로 산다한들 이렇게 많은 사연을 만들 수 있을까? 즐거운 일, 슬픈 일, 괴로운 일 그리고 기쁜 일, 모두 지내 놓고 보니 인간인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노력하는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살아오면서 그러한 생각을 많이 하였다. 오로지 하느님이 주관하신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나의 삶의 기록은 대부분 기억에 기초한다. 일부는 내가 과거 남겨놓은 서류나 책들에 의존하였다. 그때는 먼 훗날 이런 책을 쓰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지만, 모든 흔적을 없애 버리지 않고 일부라도 기록을 남겨 놓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하여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서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잊고 지냈던 풍경과 사진 속의 인물들이 너무나도 생생하다. 이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보는 듯해 순간 울컥하였다. 나의 체취가 묻어 있을 옛 집무실과 집기들, 그 집무실에서 가끔 내다보며 카메라에 담아보았던 주변의 모습들이 어제처럼 눈에 선한데, 언제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나의 삶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는데, 많은 과거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요즈음은 더더욱 하루가 다르게 기억력이 약해지고 있음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내가 끝내 기억하고 있어 여기서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은, 남과 같지 아니하고 뭔가 다른, 나 ‘오진환’다운 삶, 내 삶의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쉽게 사라지기 어려운 경험이나 추억이 아닐까? 그중에서 나름 의미 있는 것들을 골라 여기에 기록한다. 정리하다 보니 잊어서는 안 될 것들, 내가 무엇을 잊었는지조차 지금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겠구나, 새삼 깨달았다.
나의 삶을 자연의 사계절에 비유하여 구분하여 보았다. 독창적이거나 특별히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일생을 자연과 대비하여 정리해 보니 대체로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내 인생의 봄은 태어나서 대학교를 마칠 때까지, 즉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성장기에 해당한다. 눈부시게 파릇파릇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여름은 가장 왕성한 청장년기로서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사생활을 마칠 때까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또한 가을은 변호사로 출발하여 각종 사회생활을 겸임하던 시절로, 법조인으로서 여름에 뿌려 놓은 씨앗이 결실을 맺는 그런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 여름과 가을이 내 인생에서 핵심을 차지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마지막으로 내 인생의 겨울은, 수확활동까지 어느 정도 마무리한 후 조용히 인생을 즐기고 노후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시기이다.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아름다운 황혼기에 속한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의 겨울 문턱에 서 있다. 어렸을 적 겨울 날 시골마을에 해가 진 후 집집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아궁이 불 연기가 굴뚝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시간이 생각난다. 그 평화롭고 고즈넉한 풍경과도 같이, 인생의 모든 과정을 어느 정도 섭렵한 후 풍요로운 밑천으로 여유 있게 삶을 살아가는 겨울날을 보내고 싶다. 그날이 언제까지일까, 그 끝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정하여 주실 것이다.
지난날을 돌아보고 잠시 감상에 젖어 본 시간들도 즐거웠지만, 앞날을 꿈꾸고 준비하는 것도 마냥 가슴 설레는 일이다. 벌써 40여 년 가까이 웃고 울며 같이 살아온 나의 반쪽, 아내(박지영 데레사)와의 향후 여정을 눈 감고 그려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행복하다. 꿈에 머물지 않고 현실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하여야 할 임무는 오롯이 나의 몫이다. 열심히 달려왔으니, 이제 조금 속도를 늦추고 지나치게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즐기고 싶다.
- 2020년 11월 후림厚林 오진환(토마)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