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모르는 국민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은 엄연한 현실이다. 정도전은 우리에게 자존심이고 자랑거리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3대 성군(聖君)이라 할 수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그리고 박정희의 공적이 정도전 한 사람에게 모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고개가 절로 숙여지게 되는 힘이 있는 경세가이다.” (머리말 중에서)
“고려는 당연히 원나라와의 국교를 청산하고 명나라와 국교를 개설해 대국의 예를 갖춰야 했다. 그럼에도 이인임의 집권파는 현실을 외면하고 친원(親元), 척명(斥明)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정도전이 조정(朝廷)에 쓴 소리를 했다.
「대륙의 정세를 정확하게 보시오. 이제 원나라의 시대는 끝나고 명나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오. 망해 가는 원나라가 우리의 국정을 농단하는 위에 고려 왕위까지 찬탈하려는 음모를 획책하고 있소. 이제는 과감하게 원나라와의 국교를 청산하고 명나라와 친교를 해야 할 것이오. 그러지 않으면 신흥 대국 명나라가 침략해올 수도 있는 정세요. 더욱이 지금은 민생마저 파탄 나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에 사무치고 있는데, 이를 외면하지 마시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쟁까지 일어난다면 우리는 절대로 감당하지 못할 것이오. 외교를 잘못해 망한 나라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들 해보시오.」” (16~17쪽)
“이 당시는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이 대토지와 권력과 무력을 틀어쥐고서,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은 채 온갖 횡포를 부리던 시절이었다.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그들이 대표적인 권력자였다.
이들은 좋은 땅이 보이기만 하면 종들을 시켜 물푸레나무로 사정없이 후려쳐서 닥치는 대로 빼앗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드넓은 토지는 산천(山川)을 경계로 삼을 정도였다.
이들이 백성들의 등에 지운 조세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생산량의 8~9할을 빼앗아 자기 곳간을 채우느라, 백성들은 정처 없이 유랑하거나 노비를 자청했고, 국고(國庫)는 텅텅 빌 정도였다.” (26~27쪽)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전쟁 준비로 나라 안이 어수선하고 각 도의 군(郡)·현(縣)에서는 군사들을 징발하느라 하루가 바쁜 이 시기에, 죽은 이자송에 이어 이성계가 또다시 전쟁불가론을 들고 나왔다.
‘전하, 지금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는 데에는 절대로 불가한 네 가지 이유가 있어 감히 아뢰옵나이다.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이 불가함이요 둘째, 곡식이 한창 무르익을 한여름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은 부적당하며 셋째, 온 나라의 군사를 동원해 원정을 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타서 침범할 염려가 있어서 불가함이요 넷째, 지금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막상 전쟁이 시작될 무렵이면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군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기에 이것이 불가하다고 아뢰는 것이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전하!’
이른바 이성계의 장엄한 4대 불가론이다.” (49쪽)
“최영은 조민수가 이성계와 손을 잡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애초에 조민수에게 좌군을 맡겨 전선으로 내보낼 때에는 암중에 이성계를 견제하려는 복선을 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계산이 빗나가 조민수가 이성계를 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칼을 자기에게로 겨누어 오고 있으니, 최영으로서는 자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큰 실수를 저질렀단 말인가!’
애초에 출정을 할 때 자신이 팔도도통사로서 군을 통솔하고 나서야 한다고 강력히 주청을 했으나, 옥좌 곁에 남아 정사를 보필해 달라던 왕의 고집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스러웠고, 우왕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와서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자신의 우유부단으로 말미암아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자책과 함께, 애를 끊는 듯한 아픔이 폐부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64쪽)
“조준의 상소로 시작된 전제개혁은 남은, 윤소종, 배극렴, 조인옥, 허응 등의 잇따른 상소로 상승세를 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기득권 세력인 보수파들의 거센 반발로 엎치락뒤치락했다. 조정에는 일대 전쟁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성조(聖祖) 이래로 내려온 법을 갑자기 고친다면 평지풍파가 일어서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워질 것이오.’
이색이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서자 이림, 우현보, 변안열 등도 우후죽순처럼 거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이색은 사대부들로부터도 유종(儒宗)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권근과 유백유 그리고 이숭인 같은 많은 중신들도 그의 주장을 뒤따랐다. 이제 이색은 보수세력의 완벽한 수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87쪽)
“이렇듯 역성혁명을 주장하는 맹자야말로 선진적인 사상가임에 틀림없었다. 정도전은 마음속으로 맹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삶을 관조했다. 이 같은 관조와 성찰은 훗날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 되어 새 나라의 청사진을 그릴 때 탄탄한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포은(圃隱)은 학당 동문 선배가 아니라 스승님 못지않은 선학(先學)이로구나.」
맹자를 읽고 또 읽으면서 ‘인의(仁義)’의 왕도(王道)에 감동했고, ‘백성이 하늘이고, 하늘이 백성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108쪽)
“정도전이 귀양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조준과 남은 그리고 조인옥이 이성계의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포은이 이젠 완전히 미쳤나 봅니다. 삼봉을 치다니, 그자가 말로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 이 시중 아니었으면 언감생심 오늘의 자리에 오르기나 했겠소? 뱃속에 칼을 감추고 있었던 것을 그렇게 모르고 있었다니…….’
‘차라리 이참에 정몽주를 베어버립시다.’
살기 섞인 목소리가 툭 튀어나오자, 갑자기 좌중에 긴장감이 팽배해지며 일순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정도전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오. 그러나 조만간 때가 올 것이니, 그때를 기다려 치기로 합시다.’ ” (131쪽)
“ ‘이번엔 내가 한 수 읊어 보겠네.’
역시 성리학의 대가다운 무게가 느껴졌다. 그가 입술을 들썩일 때마다 방원의 머리카락이 쭈뼛거려졌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가 읊어대는 시조가 자신의 목을 겨눈 칼처럼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방원은 태연하고도 공손하게 말했다.
‘시중 어른의 충성심은 언제 어디서나 빛나십니다.’ ” (151쪽)
“이성계는 즉시 도당(都堂)에 명을 내렸다.
‘문무백관과 기로(耆老:은퇴한 원로대신)들은 모두 도당에 모여 국호 개정에 대한 논의를 하라!’
도당에서 활발한 논쟁을 벌인 결과,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가지 명칭이 정해졌다. 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등 역사적인 맥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화령은 이성계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선택되었다.
그리하여 1392년 11월, 예문관 학사 한상질을 명나라로 보내어 조선과 화령 둘 중에서 하나를 국호로 택해줄 것을 청하였다.” (179~180쪽)
“정도전은 한양 건설의 설계도를 직접 그리면서 《주례》의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에 나오는 국도조영(國都造營)의 원리를 따랐으나 우리나라 자연환경의 순리를 절대로 거스르지 않았다는 점이 특색이다.
‘동관고공기’란 주나라 이후 중국의 도성과 궁궐을 건설하는 데 원칙으로 삼던 건축서다.
정도전은 동관고공기의 조영의 원리에 따라 북악을 주산으로 삼아 그 바로 밑 중앙에 정궁(正宮)을 세우고,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의거하여 궁궐 좌편에 종묘(宗廟), 우편에 사직단(社稷壇)을 배치하여 세웠다. 종묘는 왕실의 조상신을 모신 곳이고, 사직은 토지와 곡식을 주관하는 신을 모신 곳이다.” (190~191쪽)
“정도전은 한때 병권을 틀어쥐어 군사 양성, 훈련, 운영의 책임을 맡았었다.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깨달았다.
「군사제도의 운영은 나라의 군사력을 강건하게 키우는 것이 주 임무이기도 하지만, 군사 개개인을 바른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군사제도를 경영하는 이념적인 기초로서 ‘백성과 군사를 아끼고 나라를 바르게 인도한다’는 대원칙이 전제되어야만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
군제에서 주나라가 병농일치를 제도화했던 점에서 배웠고, 이성계가 함주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으면서 병농일치를 실행하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214~215쪽)
“불씨(佛氏)가 처음에는 걸식을 하며 먹을 뿐이었는데도 군자가 의로써 이를 책망하여 조금도 용납함이 없었다. 하물며 오늘날에는 저들이 화려한 전당과 큰 집과 사치한 옷과 좋은 음식으로 편안히 앉아서 향락하기를 임금처럼 하고 있다. 넓은 전원과 많은 노비를 두어 문서가 구름처럼 많아서 공문서를 능가하고, 분주하게 공급하기는 공무보다도 혹독하다.
그 도에서 말하는 이른바 번뇌를 끊고 세간에서 나와 청정(淸淨)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가서 찾으란 말인가. 가만히 앉아서 옷과 음식을 허비할 뿐만 아니라 호사(好事)라고 거짓 청탁하여 갖가지 공양이며 음식을 낭비하고 비단을 찢어 불전을 장엄하게 꾸미니, 평민 열 집의 재산을 온통 하루아침에 소비한다. 아, 의리를 저버리어 이미 인륜의 해충이 되고, 물건을 함부로 쓰고 아까운 줄 모르니 이는 실로 천지의 큰 좀벌레로구나.” (228쪽)
“홍무제는 사신 설장수 편에 보낸 선유(宣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조선 국왕에게 정도전이란 자는 대체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이자가 화(禍)의 근원이라는 것을 조선 국왕은 왜 모르는가? 나라를 열고 기업을 온전히 이어가려면 소인은 쓰지 말아야 하거늘, 새로 개국한 조선에서 등용한 자들을 보니 삼한 백성들의 복이 아니요, 화수(禍首)로다. 지금 여기에 있는 정총, 임약항, 노인도가 만일 조선에 있었다면 반드시 정도전의 한 팔이 되었을 것이요, 곧 이들로 인하여 화(禍)가 벌써 왕에게 미쳤을 것이니 왕은 살필지어다. 만일 정하게 살피지 않으면 화가 조선에 미칠 것이로다.’
홍무제는 금릉의 옥좌에 앉아 있으면서도 조선의 정국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조와 정도전이 요동정벌의 꿈을 내놓고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가 수면 아래에서 진행시켜야만 했다.” (242~243쪽)
“왕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다. 그것이 무엇일까?
백성을 생각하는 일이다. 백성을 위하고(爲民), 백성을 사랑하고(愛民), 백성을 존중하고(重民), 백성을 보호하고(保民), 백성을 가르치고(牧民), 백성을 편안하게(安民)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백성이 순종하고 따르게 된다.
지금 법을 만들고, 나라를 위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려고 하는데 그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눈앞에 길이 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길이다.” (253~254쪽)
“어쨌거나 조선이 개국하자마자 현비 소생의 아들을 세자로 세운 것은, 자신이 군사력으로 고려 왕실을 무너뜨렸다는 태조 이성계의 자괴감, 자기 소생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려는 현비의 소망, 그리고 재상 중심의 신권주의(臣權主義)를 표방한 정도전의 노선 등이 어우러진 선택이었다.
이 당시는 개국 초기의 어수선하던 시절이라, 대신들이나 왕실 종친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강하게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돌이켜 보자면, 이러한 세자 선택은 태조와 정도전의 실책으로 볼 수 있겠다.” (269쪽)
“그해 7월, 태조의 엄명이 내려졌다.
‘장병을 훈련시키는 것은 군국(軍國)의 급무이다. 이제부터 모든 군사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장수부터 사졸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도(陣圖)를 익히도록 하라. 훈련에 태만하거나, 진도에 숙달하지 못한 자는 군율로 엄히 다스릴 것이노라!’
또한 8월에는 사헌부에 교지를 내렸다.
‘절제사를 맡고 있는 왕실 종친들, 그리고 군직을 가진 중신들 가운데 진도 훈련에 불참하거나 제대로 익히지 못한 자들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왕명이 추상같은지라 사헌부에서는 훈련 상황을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291쪽)
“정도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공과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공을 도와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갈 길이 죽음의 길이라면 피하지는 않겠으나, 억울함은 금치 못하겠소.’
‘무엇이 그렇게 억울합니까?’
‘평생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모두 해냈으나, 단 하나 못 이룬 일이 있다면 바로 요동정벌로서 그 꿈을 단 한순간도 잊어본 일이 없소. 나는 오직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병법도 많이 연구했고, 전하께 말씀드려 군사들에게 강무도와 진법을 열심히 가르치며 훈련시켜 왔소. 그런데 지금 그 꿈을 접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그렇게 억울할 뿐이외다.’ ” (314~315쪽)
“《삼봉집》에는 정도전이 죽기 직전에 읊었다는 시(詩)가 실려 있다.
자조(自嘲)
살피고 또 조심하여 온통 공을 들여서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놓은 업적
송현방 정자에서 한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 정도전은 한순간의 방심으로 대업을 접게 된 순간, 그 꿈을 한(恨)으로 남겼다.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나라의 이상을 마지막까지 가슴에 품고 그 이상을 이루고자 했던 혁명아였기 때문일 것이다.” (333쪽)
“정도전은 조선(朝鮮)을 설계하고 만들어 낸 기획자이다. 그 조선이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정도전은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역사적 인물이다.
정도전은 왜 위대한가?
그의 사상은 민본주의(民本主義)를 기초로 삼았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고 나라의 근본이라는 주장이다. 왕조 시대에 이런 착상을 했다는 것은 혁명아이며 이단(異端)이다. 왕이 나라의 주인이고 백성은 왕의 복속물이라 여기고 있던 시대에 이런 발상을 하기란 정말 쉽지가 않다.” (끝맺는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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