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함께 먹는 것’, 이 지극히 단순하고 본능적인 행위가 나름의 의미를 가질 때, 같이 먹은 밥공기 수만큼이나 함께한 시간이 쌓이고 쌓여 진정한 관계의 양분이 될 때, 나는 비로소 “당신이란 사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래서 말인데, 오늘 우리 같이 밥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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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못 닦을지언정 식기라도 잘 닦자는 나름의 신념(고집)은, 때때로 설거지를 향한 과도한 집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내심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더러워진 그릇들을 따뜻한 물에 깨끗이 씻어낼 때 내 마음에 눌어붙은 감정의 찌꺼기도 부디 같이 쓸려 내려가기를 말이다. 때로는 마음에도 설거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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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재료를 찾는 일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 음식도 자주 먹어본 음식이 더 맛있듯, 보통은 익숙한 표현이 더 마음을 울리는 법이니까. 열심히 찾은 재료들로 문장을 만들고, 문장과 문장을 엮어 한 편의 글을 짓는다. 그리고 다시 글과 글을 엮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일련의 과정들은, 요리사가 자신만의 ‘시그니처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떨리고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설레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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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요리는 ‘여유’의 상징이다. 어느 날 문득 요리를 할 마음이 들었다는 것은, 과로사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마음 한편에 작게나마 바람이라도 통할 여유 공간이 생겼다는 뜻이다. 억지로라도 마음이 쉴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나를 위한 요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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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심심함과의 싸움이다. 하릴없이 보낸 오늘 하루가 그렇고, 이제 막 한 숟갈 뜨려는 설렁탕의 이 허여멀건 국물도 그렇다. 나는 지금 소금을 넣을지 말지로 내적 갈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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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상상해보곤 한다. 그날, 콩국수 바닥에 파묻혀 있던 미원 찌꺼기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회사를 그만둔 지금도 난 여전히 그 집 단골이었을까. 만약 그의 카톡을 우연히 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으려나. 크게 의미 없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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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정녕 타인의 존재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걸까. 사람에 상처받으면서도 사람 사이에서밖에 살아갈 수 없고, 관심은 부담되지만 존재감은 잃고 싶지 않은 모순된 자아(自我). 우리는 모두 초밥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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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음식이든 국물만 좀 남았다 하면 밥을 볶아버리니, 원. 한국인은 볶음밥의 민족이 틀림없다. 문제는 ‘양’이다. 메인요리를 끝내고 이미 어느 정도 배가 찬 상태에서 주문하기 때문에, 얼마나 시킬지 양을 가늠하기가 힘들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1인분만 시키는 게 맞는데 왜 볶음밥을 외치는 그 순간에는 꼭 다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지, 자꾸 무모한 욕심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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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의 다른 말은 ‘조금 모자라다 싶게’가 아닐까. 앞으로 볶음밥은 무조건 ‘2인에 한 개’로 해야지. 사랑도 마찬가지다. 서로 소화할 수 있는 양만큼의 감정을 주고받아야지.
--- p.109
고민이 있어도 털어놓지 않은 지 꽤 오래 되었다. 고민이고 감정이고 혼자 삭이는 데에는 이골이 났다. 나조차 이해가 안 되는 감정들을 타인에게 명료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속으로만 생각하고 생각하다 별다른 도리가 없음을 깨달으면 그저 잊는 것이 최선이다. 혹은 유유히 내 마음에서 떠나보내거나. 그렇게 하는 것을 나는 어른이 된 대가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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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참고 야식을 먹은 날은 매번 이런 식이다. 포만감이 주는 행복과 그새 더 뱃살이 불어난 것 같은 자괴감 사이에서 한참을 방황한다. 그러다 닭 한 마리 무게만큼의 후회를 팔뚝, 허벅지, 복부에 골고루 나누고 다시 주섬주섬 침대로 돌아가 눕는다.
--- p.153
원체 조금 변덕스러운 성격인 것은 인정한다. 그로 인해 지금껏 살아오면서 무엇 하나 끈기 있게 좋아해본 적이 없었던 것도 맞다. 더군다나 요즘 같아서는 내 마음을 나조차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애착의 대상이 녹차 라떼 따위면 상관없지만, 혹여 나의 이 못된 변덕이 사람에게까지 적용될까 겁이 난다.
--- p.173
오늘따라 아메리카노가 너무 쓰다 싶을 때는 물을더 타면 그만이고, 케이크가 모자를 때는 하나 더 주문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인생은 내 마음대로 농도 조절을 할 수 없다. 도대체 주문한 케이크는 언제 나오는지 알지도 못한 채 쓰디쓴 아메리카노만 속절없이 마시며 마냥 기다리는 것이 인생이다.
--- p.184